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정의 서 Feb 02. 2024

남편의 이름

그림 이은숙

점토판 대신 두텁고 거친 질감의 종이를 구했다. 그리고 몇몇 글자를 써본다. 흙을 파고드는 감각과는 다른 새김이 있다. 종이 결에 걸려서 내는 펜 끝 소리도 나쁘지만은 않다. 그 걸림이 어눌한 선의 운행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쓰기에 관여하는 온갖 감각들에 더해 철학자의 영혼도 잉크와 함께 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문자가 언어를 영혼으로부터 분리해 벽 속에 가두리라는 경고는 무언가를 쓰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무효이다.


선들이 뒤엉켜 무슨 모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뒤죽박죽 엉킨 철학자의 언어공간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복잡한 미로 속에서 철학자는 선 하나를 붙잡는다. 그리고 선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마치 필경사처럼 말없이 쓰는 것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짚어보려는 것이다. 의식을 잃던 그날도 철학자는 글을 쓰고 있었다. 온 신경을 집중해 움직이던 손을 멈춰 세운 두 글자는 남편의 이름이었다. 그가 설계하고 조립하는 기계 설명서처럼, 그 이름 또한 딱딱하고 메마른 획의 배열일 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인이 노래한 추억이나 사랑, 동경 따위의 정서는 그 글자에서 떨어져 나갔다.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름, 정말이지 영혼으로부터 격리된 언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러 형상을 지나 선이 멈춰 선 곳은 노란 버스 앞이었다. 환한 미소로 마중 나온 아빠를 그리며 혼잡한 버스 안을 비집고 나오던 철학자는 짙은 눈썹의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딘가 모르게 아빠를 닮은 그 남자가 두 아이의 아빠가 되리라고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아빠의 어릴 적 이름과 같았고, 철학자는 그 이름을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불렀었다. 선의 끝을 붙잡고 서서 어느 순간 비정하게 현실로 내동댕이쳐버린 이름자를 떠올린다. 속죄의 의식처럼 조심스레 두 글자에 소리를 불어넣어본다. 따스한 공기에 감싸인 이름이 철학자의 두 눈을 씻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꽃잎이 찾아준 글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