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고 싶은 이야기ㅣ그림 이은숙
철학자의 서고는 다시 쓰는 팰림프세스트처럼 작동한다. 쓰기의 흔적이 서고 곳곳에 남아있고 그 흔적 위에 다시 소리를 입히고 사라진 기억을 전혀 새로운 감각과 기분으로 재형상화하는 작업대인 것이다.
오래된 스케치 한 점에 철학자의 마음이 뭉클해진다. 두 아이의 졸업장이며 성적표 등을 보관해 둔 상자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자 그림은 말썽 많았던 둘째 아이의 유년기 기록이었다. 빛바랜 종이에 구김까지 심해 정확한 형상은 알아보기 힘들지만 연필로 꾹 눌러 그린 사자의 기세는 여전했다. 할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아이는 자기표현이 분명했고, 자라면서 그 강점은 잦은 갈등으로 왜곡되었다. 스케치를 들여다보며 느끼는 지금의 흐뭇한 감정을 아이의 사춘기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어쩌면 이토록 아픈 상실은 철학자의 인생을 비켜 갔을지도 모른다.
성장기 아이들은 철학자를 도서관으로 내몰았다. 어쩌면 스스로가 두 번째 가족을 피해 달아난 것인지도 모른다. 도서관의 활자들 속에 파묻혀 있으면 그 순간은 억울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잊고 지나갈 수 있었다. 아빠를 그리며 찾은 새로운 가족이 울타리가 되어 주지 않아 억울했고, 아빠를 닮은 아이의 반항이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그런 철학자에게 무미건조한 활자의 위로는 컸다. 차라리 무표정하게 자신을 대하는 활자 덕분에 아내나 엄마가 아닌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의 의무를 강요하는 권위적인 활자도 있었지만 그 정도 중압은 두터운 책장을 더 힘주어 덮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활자로의 도피가 철학자를 숨 쉬게 했고, 또한 바로 그 활자들을 다루다 철학자는 쓰러졌다.
언어의 망각이 철학자를 슬프게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규정된 언어들, 아내와 엄마, 그리고 제자와 스승이라는 이름에 짓눌려 살아가던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준 선물이기도 하다. 가족을 피해 달아난 거대한 도서관에서 그리고 온통 하얗게 둘러싼 망각의 병실에서 돌아온 철학자는 아주 소박한 서고를 서성이며 잠든 활자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활자에 조심스레 소리를 입혀가며 진짜 언어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 틈으로 삐져나온 둘째의 스케치에 먹먹해지는 것은 그 또한 아빠가 보내준 선물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