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행>
일부러 억지 아날로그 감성을 낼 것도 없이 그때는 촌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우리는 여전히 지도를 들고 여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관광 안내소에서 얻었던지 먼저 발리에 와 있던 친구가 넘겨주었던지 절반은 찢긴 발리 지도를 손안에 들고 곳곳을 누볐다. 우린 낡고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빈티지하고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들을 모으길 좋아했고 그는 그저 최신의 삶에는 느린 프랑스인이었다.
스쿠터를 타고 길리 섬 까지 달리던 날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남아시아를 여행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달리다 보면 비가 쏟아지고, 다 젖었다가 다시 해가 쨍쨍 나면 빠짝 마르기를 반복하고. 어느 서양 남자와 동양 여인이 미친 듯이 쏟아져내리는 폭우 속에서 스쿠터를 타고 산맥을 넘는 꼴을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재밌다는 듯이 뻔히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우리 둘의 동행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요즘은 특별할 것도 없이 흔해 빠진 조합이겠지만.
백인 남자와 다니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온통 백인들 천지였다. 한국 여자를 만나보았던 남자들은 백인들 앞에서 수줍게 웃으며 눈 마주치기를 어려워하는 동양 여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들이 전형적인 한국인 여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오는 것이 꽤 신경질 났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부러 최대한의 전형적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으려니 그 덕에 아무도 나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국적불명. 내가 한국인이라고 답하면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인 직원을 수백 명쯤은 보아왔을 호주 사장님은 나를 여태껏 만나본 한국인 중 '가장 익스트림한 코리안 여자'라고 불렀다.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더 크게 깔깔대며 웃었다. 그런 수식어들이 듣기 좋았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작고 작은 관념들을 깨트리는 일. 나는 어느 날 프랑스 남자에게 말했다.
"있잖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나는 어쩌면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난 거야! …"
발리행은 그야말로 모험으로 남았다. 계산이나 계획 없이 눈에 보이는 가장 빠른 항공권을 사서 떠났고 통장 잔고를 걱정 없이 메뉴를 6개쯤 시키고 친구가 좋다고 추천한 섬으로 무작정 떠나고. 발이 가는 대로 그냥 걸었다. 발리에서 만난 사람들 중 공항의 택시기사를 제외하면 모두가 친절했다. 이제 막 호주에서 떠나온 우리는 빠르게 화폐의 계산을 넘나드는 것이 여전히 어설픈 외국인 둘이었다. 50,000원을 거슬러 주어야 할 택시기사가 무려 0 하나가 더 빠진 5,000원을 거슬러 주었다. 발리에 도착한 흥분과 설렘 속에서 택시기사에게 감사 표현을 아주 많이 했는데. 호텔에 도착해 거스름돈을 정리해보다가 알아챘다. 유럽 남자가 당한 생애 첫 사기였다.
그의 몸에 몇 번째 새겨지는 그림일지 몰라도 발리에서 떠나기 전 타투를 새기러 갔다. 마지막 밤이었다. ‘프리덤’이라고 적힌 손목의 간단한 레터링. 내 눈에는 충분히 자유롭게 사는 것 같은데. 이 젊은 유럽인은 뭘 그렇게 자유를 갈구하는 걸까. 프리덤의 반대편 손목에는 엄마와 아빠, 동생들의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었고 가슴께에는 후회하며 살지 않겠다는 영어 문구가 적혀있었다. 바늘이 위-잉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저것이 얼마만큼이나 아플까 에 관해서만 궁금해했다.
호주인들 중에는 뭐라고 적혀있는지도 모를 커다란 문신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심미적인 요소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추한 문신이라며 유럽 아이들은 떠들었다. 문신 하기를 5년째 고민만 해오던 나는 못생긴 문신과 아름다운 문신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문신의 불이익을 걱정하던 날이 있었다. 언젠가는 회사에 들어가고 남들처럼 그렇게 살 거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고려했던 것이다. 그 고민이 10년째 되던 해에 날아가는 새를 그려 넣은 문신을 했다. 그 뜻은 결국 10년이 다되도록 문신이 보이면 안 되는 어느 대단한 직장에 취직할 일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으로부터 도망갔으니 문신을 마구 그려 넣을 수 있는 몸뚱이가 완전한 내 것이 되었다. 내가 지난 10년 동안 몸에 그려 넣기를 간직해오던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