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동거>
자발적인 떠돌이 생활은 계속되었다. 섬을 떠나 다시 도시로, 도시를 떠나 다시 시골로. 넓고 넓은 곳에서 다시 작고 작은 나와 우리가 있을 곳으로. 새벽에 가까워져 도착한 어느 작은 동네의 호텔에는 방이 없었다. 유일한 곳이라 딱히 두리번거릴 것도 없었다.
"차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주차장에서 자고 내일 떠나면 안 될까, 하는 우리를 가엾이 여긴 사장이 창고로 쓰이는 방 한 칸을 절반의 값에 내주었다. 거미줄이 그득그득 쳐져있었지만 두 사람 몸뚱이를 들여놓기에는 충분히 널찍했다. 프랑스 남자는 바닥을 대충 쓸고 신문지를 깔았다. 너무 추워 우리 둘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기로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하- 춥다' 우리는 서로 입김을 내뱉고 웃었다. 그는 나를 꽉 껴안았다.
꾀죄죄한 날들이 하나, 둘.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겁할 사람들이 둘, 셋. 한국의 친구들이, 특히나 엄마가 나를 본다면 분명 혀를 끌끌 찰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러나 꾀죄죄한 나의 얼굴이 내가 불행하다는 뜻인가? 내 피부는 점점 까맣고 거칠어져 갔는데 마음은 점점 더 미끄덩 해졌다. 내 옆자리의 낯선 이에게 쉬이 인사를 건네고 친구가 되는 것이 익숙해졌다.
일부러 히피족이 되려고 한 건 아닌데. 죽어도- 못할 일이라면 애초에 이렇게 살 운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렇게 살 운명이라는 것은 화장실이 5분 거리에 있는 텐트 밖으로 새벽에 오줌을 누기 위해 머리에 렌턴을 달고, 신발을 신고, 화장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프랑스 남자에게 투덜댔다. ‘ 이건 해도 해도 좀….’
걱정 말라며 나를 재차 안심시키던 프랑스 남자는 실력 좋게 뚝딱뚝딱 텐트를 혼자 만들어냈다. 이쪽은 네 방, 이쪽은 내 방. 머리를 뉘일 곳이 있고 두세 가지 화장품 정도 꺼내놓을 공간까지 있으니 딱히 집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텐트 밖의 키가 커다란 야자수, 초록빛의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모두 나의 마당이었다. 가끔 캠핑장의 친구들 모두 모여 탁구를 치는 탁구장도 집의 일부였다. 야자수로 둘러싸인 언제든 뛰어들 수 있는 수영장도 나의 집이었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는 날에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분위기를 냈다. 널찍한 마당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 요리해 먹일 수 있었다.
매트리스 바람이 빠졌다 싶으면 가끔 내 몸 만한 매트리스를 들고나가 다시 공기를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었다. 우리처럼 텐트에 살고 있던 친구들은 몇 주를 주기로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바닥에 깔린 돌들을 바닥 삼아 자는 것이 익숙해졌다. 맨발로 돌 위를 걷고 풀 냄새를 맡으며 사는 것이 좋아졌다. 우리는 전기세도, 수도세도, 집세도 걱정할 것 없이 언제든 자유롭게 떠나고 돌아왔다. 나는 유난히 ‘배낭 하나’의 삶에 집착했다. 딱 40L 배낭 안에 들어가는 만큼만 물건들을 솎고, 또 솎았다. 소유한다는 것은 때로 그 삶조차 소유에 의해 속박당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집에 산다는 것이 중요한가? 어떻게 산다는 것이 중요한가?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았다. 질문의 답이 크게 궁금치 않았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 없이 길 위에서 잠든 지 꼬박 3개월째 되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