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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세 Jan 31. 2020

레알, 마드리드에 왔습니다.

어느 모드리치 덕후의 베르나베우 원정기


    마드리드에 와 있다. 지난해 연차를 1.75일 쓴 것에 충격받고 무작정 비행기 표를 끊었다. 여전히 바빴던 지라 행선지를 정하는 데도 깊이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아, 이젠 레알 마드리드 경기 보러 갈 때가 됐다’. 그냥 이 생각 하나로 딸랑 축구 경기 티켓과 첫 도시에서의 숙소만 확정하고는 스페인으로 날아왔다.


24시간 레알 마드리드만 다루는 채널이 있는 나라에 왔다.


    떠나오기 전 주변에 나의 계획을 말하면 다들 하나같이 ‘호날두 있을 때 갔었어야지’라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봤다면 좋았겠지만 크게 아쉽진 않았다. 나의 최애 선수는 모드리치이기 때문이다. 왜 모드리치가 좋냐고 묻는다면 나는 보통 한 마디로 이렇게 답한다. ‘그가 언제든 자기 몫을 다 해내기 때문에’라고. 팀의 부침, 경기의 승패와 상관없이 모드리치는 어지간하면 풀 타임을 뛰며 팀의 허리를 책임진다. 묵묵히 경기를 짊어지지만 동시에 감각적이고 유려한 플레이로 자신의 존재감을 빛낸다. 경기장 밖에서 딱히 잡음을 일으키는 일도 없다. 적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인간상과도 가까운 것 같다. 나는 생색내지 않으면서 센스 있는 류의 사람을 아주 좋아한다.



    예매한 경기는 지난 토요일에 열린 세비야 전이었다. 라 리가에서 꽤 볼 만한 대결이고, 이 경기에 레알의 리그 1위 탈환 여부가 달려 있어 더욱 주목받는 매치였다. 나는 금요일 밤늦게 도착해 겨우 한숨 자고 일어나 점심을 먹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경기장에 가기 전 들른 오피셜 스토어에서 팬심이 한 번 훅 솟은 탓인지 더욱 두근거렸다. 일전에 EPL 직관을 갈 때는 마냥 신나더니만, 본진을 보러 가는 것은 이런 걸까. 어쩐지 긴장되기까지 했다.



    실제로 경기는 내 생각보다 더 마음 졸이며 보게끔 전개됐다. 밥 먹듯이 이기고 1위를 수성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과는 달라진 위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흐름이 바뀔 때마다 공격 라인은 턱없이 늦게 정비됐고, 골문 앞에서는 안타까운 실수들이 자꾸 빚어졌다. 팀이 지지부진할수록 모드리치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영역을 커버하며 뛰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덕후의 마음은 마치 친오빠의 군 훈련 모습을 볼 때나(주: 오빠 없음) 남편이 일하는 현장을 볼 때(주: 남편 없음)에 버금가게 절절하기 짝이 없었다. 전반전 내내 나의 시선을 가장 잡아끈 건 고군분투하는 모드리치와 경기장 한가운데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단이었다. 팀원들 가장 가까이에서 매번 이 광경을 감내해야 하는 감독의 무게는 정말이지 모른 척하고 싶었다.



    후반전에 이르자 경기의 흐름은 레알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여전히 속 터지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도 있었지만(^_ㅠ) 각자 자기 영역에서 더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카세미루가 골을 넣으면서부터는 홈팀 응원의 기세가 대단해졌다. 세비야가 선전할 때면 관중이 야유의 휘파람을 부는데 (과장 조금 보태) 마치 새들의 울음이 소용돌이를 빚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현장에서 보는 모드리치의 탈압박은 유연하면서도 힘 있는 무용처럼 아름다웠고, 모두의 성원 속에 벤제마가 출전할 때는 환호가 절정에 달했다. 85분쯤부터는 양 팀 모두 눈을 뗄 수 없이 빠른 호흡으로 움직이는데... 위닝도 이렇게는 컨트롤 못 하지 않겠나요. ‘짜릿한 속도감이 관객을 쥐락펴락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오락의 기운 하나 없이 선수들이 죽어라 뛰는 가운데, 삐- 경기 종료 버저가 울렸다. 결과는 2:1.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였다. 


첫 번째 골 직후의 함성. Goooooooal을 실제로 들었다!


    경기 시작 전 일찌감치 나와 몸을 풀고 팬들에게 손도 흔들어 주던 스윗한 모드리치는 시합이 끝나자 가장 먼저 필드를 떠났다. 아주 무겁게 몸을 이끌고 나가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데, 승리의 감격과 사람들의 환호를 즐길 여력이라곤 전혀 남지 않은 듯이 보였다. 자기 몫을 다 해내려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마치는 것 외에 어떠한 관심도 두지 않고 에너지를 쏟으면 저런 느낌이겠구나. 어떠한 종류의 감동은 뜨겁고 뭉클하기보다는 상쾌하게 찾아온다. 수만 명의 관중이 쏟아낸 후텁한 기운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을 텐데도 나오는 길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스탠드 쪽으로 내려가 좀 더 가까이서 경기장을 보며 맑은 기분을 즐기고 있자니 가드가 불쑥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이 그때 마음 그대로 개운하게 브이- 하고 웃어 보였다. 덕분에 운 좋게도 꽤 맘에 드는 사진을 남겼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아끼는 종목에서 어렵지 않게 교훈을 찾아내곤 한다. (우리는 슬램덩크와 H2를 볼 때부터 그렇게 훈련되었다) 나는 좋아하는 선수의 플레이를 보며 무언가에 밀도 높은 집중력을 쏟아내는 태도를 다짐한다. 중계 화면에 잡히지 않는 경기장 안 사소하게 따뜻한 풍경에 행복해지고, 90분 안에 뜨겁게 넘실대는 다이내믹을 사랑한다. 관객의 달궈진 여흥을 식혀주는 텅 빈 베르나베우의 서늘함 또한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축구가 좋고, 레알 마드리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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