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마다 특성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국어/영어 같은 언어과목 서술형 채점이 가장 어렵고 그다음을 사회/역사교과가 차지한다. 사회와 역사 둘 다를 가르치는 내 입장에선 사회 교과의 서술형 채점이 조금 더 난해하다.
1.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의 그 유명한 말, 보이지 않는 손을 쓰라는 문제를 냈다. 옛날엔 단답형을 자유롭게 낼 수 있어서(지금도 일정비율은 가능하다) 쉽게 맞추겠거니 하고 출제했다. 쓰거나 못 쓰거나, 흑백 같은 채점 와중에 "안 보이는 손"이 등장했다. 매~우 어색한데, 생각해 보면 invisible hand니까 안 보이는 손도 틀린 건 아니고.. 결국 고민하다 맞게 했다.
2. 고온다습
열대우림기후의 기온과 강수량 특징을 서술하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고온다습하다가 답이었는데, "덥고 축축하다"라는 답안에서 채점 진도가 안 나갔다. 더운 건 맞는데, 축축하다.. 는 애매했다. 다습의 의미가 단순히 습도가 높은 것만은 아니고 비가 많이 내린다는 건데, 습도만 따지면 한랭한 곳도 높을 수 있고, 비습이라는 개념이 있지, 등등. 여러 가지 고민 끝에 결국 부분점수를 부여했다.
3. 고온건조
지중해성기후의 여름철 기후 특징을 역시나 기온과 강수량 측면에서 서술하라고 했다. 답은 고온건조인데, "덥고 마른다"가 있었다. 마른다가 건조하다와 같은가를 또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생각했다. 마른다는 살이 빠진다는 의미도 있고, 또 건조하다는 뜻도 있고. 이 문제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부분점수 부여로 마무리했다.
4. 랜드마크 활용
점수를 퍼주기 위해집에서 학교까지 오는 길을 랜드마크 1개 이상을 활용해 서술하라는 문제를 냈다. 뭐가 됐든 인상적인 건물 이름 하나를 넣어서 쓰면 되는데, 꼭 한 반에 한 명씩은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느 정류장에 내려서 몇 미터쯤을 걸으면 교문이라고 써놓는다. 정류장이 랜드마크인가, 교문이 랜드마크인가에 대해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웬만하면 부분점수라도 주는 내가 그 답에는 0점을 줬다. 도저히 랜드마크라고는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교육청은 자꾸 서술형의 비중을 높이라고만 하고, 학교는 학생수 감소로 학급이 줄다 보니 한 교사가 과목과 학년을 걸쳐 들어가며 채점할 답안지가 산더미처럼 증가한다.
사실 지금 근무하는 학교도 사회/역사 교사 3명이 1, 2학년 사회와 2, 3학년 역사, 총 4과목을 나누어 들어간다. 게다 (중학교 사회/역사/과학 교과의 숙명이긴 하나) 내 전공도 아닌 과목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도 과학은 시험이라도 한 교과로 묶어 보지만, 사회/역사는 교과도 나뉘어있어 지난 1학기엔 지리전공이자 지리교과로 임용된 내가 2학년 사회(일반사회)와 2학년 역사(서양사) 문제를 출제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학교에선 사회/역사 서술형이 없어진 지 오래다. 대부분 잘 못 쓰기도 하고, 채점을 하는 게 엄두가 안 난다. 어느 해엔 3개 학년을 다 들어가고 사회와 역사 두 과목을 가르치게 됐더니 시험 한 번마다 채점해야 할 서술형 답안이 900개씩이었다. 그렇게 1년을 하곤 학을 뗐다. 그때 교육청 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을 직접 겪어보면 그런 탁상행정 같은 소리 덜할 텐데..
어쨌거나 서술형은 내는 사람도 푸는 사람도 모두 부담스럽긴 매한가지다. 글을 쓰는 능력이 중요한 건 충분히 공감하나, 외워서 내뱉는 데 급급한 서술형 답안이 거기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오히려 긴 호흡으로 수업에서 단계별로 완성해나가는 글쓰기가 훨씬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업 설계가 어렵고 귀찮아서 그렇지, 서술형 평가에 비할 바가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