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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세영 Feb 03. 2024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았다

나 참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살아가겠지.

정부 24 어플을 통해 학창시절의 생활기록부 조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기억나지도 않고, 좋은 기억도 별로 없던 고등학교 시절이 문득 궁금해졌다. 방법도 알았겠다 바로 정부24 어플에 접속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집에 그것도 침대에 누워서 십년도 더 전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니.


몇번의 클릭으로 나라는 신원이 인증되고, 발급이 완료 되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생활기록부를 열어 보았다.


제일 처음으로 별 특별할 것 없는 출결사항이 떴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2학년에 무단 지각 1회. 글자를 보니 그 날이 떠오른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어여쁜 담임 선생님은 지각하는 학생들에 치를 떨며 지각비 제도를 선언했다. 생전 늦잠은 커녕 새벽 5시에 기상해 첫차 타고 등교하던 내가 지각비 제도가 시행되자 마자 지각을 하게 되었다. 눈을 뜨니 요상하게 개운한 몸과 밝은 하늘이 시계를 보지 않았음에도 지각임을 알려줬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수업 시작 전에 세이프 했으나, 지각은 지각. 어쩔수 없이 주머니 탈탈 털어 천원을 냈던 기억이 난다.(지각비는 2학년 말에 다 함께 식사 하는 비용으로 사용했다. 천원 내고 뷔페에 가서 배터지게 먹었으니  본전 뽑았다고나 할까)


수상내역이 이어졌다. 봉사와 독서 관련 상이 나열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한 교내 수상 내역이었지만 봉사와 독서, 글짓기 관련 상을 받은 것을 보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 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독서를 사랑하고 선뜻 주위를 도와주는 박애주의적 성격이 수상 내역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1학년 때, 반에 몸이 불편한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쩌면 일말의 동정이 날 움직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더 큰 불편의 시선을 받는것이 싫어 시작한 것이었다. 어른이 되어 돌아본 17살짜리의 이 행동은 참 멋지고 용기있다. 지금의 나는 고작 버스벨 누르는데 용기를 가져다 쓰고 있다. 17살의 내가 보면 우스을 일이다.

 

성적이야 뭐, 곤두박질 치고 인생 최저의 점수를 고등학교 시절에 다 받아봤으니 빠르게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숫자 아래 나열된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이 내 눈을 끌었다. 오랜시간 접어 둔 그림에 대한 열망이 두줄짜리 문장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미술. 참 좋아했다. 중학교 다니며 특수목적고등학교를 준비 하던 내가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미술학원에 있는 시간이었다. 미술을 진로로 생각하기도 했으나, 부모님의 완고한 고집 때문에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미술학원도 그만 다니게 되었다. 이런 내게 일주일에 한 시간 있던 미술 시간은 꿀떨어지는 시간이었다.  슥슥 펼쳐지는 색들의 향연이 나를 매료시켰다. 실력을 갈고 닦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내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작업이 너무나 즐거웠다. 한참을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남들은 대충 시간 떼우는 미술 수업에 열과 성을 다해 나를 뽐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조금 눈물이 고였다. 고되고 외롭고 힘들었다고만 생각 된 내 18살이 너무나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흐르지 않는 눈물을 슥 훔쳐내고 계속해서 생활기록부를 읽어나갔다. 나, 참 열심히도 살았더라. 이어진 내용에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멈출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어지는 생활기록부에는 나에 대해 사소한 부분까지 세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다. 나 조차 기억 못하던 내 모습이 19장 되는 기록 속에서 춤추며 내게 다가왔다. 기억이 하나 둘 씩 떠오르고, 그 꿈많고 열정 많던 그 아이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곤 내게 물었다.


"어때? 넌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있어?"


목안이 뜨겁게 타오르는 느낌이 들며 나는 물속에 잠겼다. 눈물이 차올라 헤엄칠 수 밖에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이 계속해서 차올랐다. 그래, 그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가고 다 낡고 헤진 나만 남아있는걸까. 대학원 졸업도 못해, 명확한 직장도 없어, 그렇다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아닌 그냥 하루 하루 숨쉬는 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암울했다. 참담했다. 내가 꿈꾸던 나의 어른된 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기를 며칠. 어쩌다 만난 동생의 말에 이 감정이 다 날아가버렸다.


"언니, 언니 가 지금 그 때에 비해 뭐가 부족해? 대학원도 다니면서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공부 하고 있지, 새벽엔 떡집 나가지, 아침즈음부턴 학교 가서 근무하지,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언니 사업 하잖어. 거기에다가 짬짬이 글도 쓰고 있고  뜨개질도 하잖아! 10년 뒤 언니가 지금을 생각하면 어쩜 저렇게 알차게 살고 있을까 기특할껄? 그러니까 지금의 언니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집중하지 말고 18살의 언니를 장하게 생각하면 되는거야. 그리고 또 오늘을 살아 가면 되는거고."


그래. 나는 열심히 살아 왔고, 열심히 살고 있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과거의 나에 침잠해 있을 필요도 없고, 미래의 나에게 기댈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을 열심히 충분히 기꺼이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더이상 내 과거에, 그리고 미래에 얽메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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