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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Apr 17. 2023

궁극의 시뮬레이터

  대본 숙지 안 됐는데 더빙 대회 나가본 적 있는 사람? 그러니까 공부 다 못했는데 시험장에 앉아 있는 거. 마킹 하나도 못 했는데 시험지 걷혀본 적은? 면접 준비 안 했는데 면접장에 가 있었던 적 있는 사람? 그게- 나야. 나는 그저 신나게 성우 학원에 갔는데, 선생님이 학생들을 인솔해서 어디론가 가는 거다.

  어머, 오늘 야외 수업이야?

신났지. 그리고 다음 장면, 더빙 대회장.

  어머, 제기랄?

옆에 앉은 유경험자 친구에게 묻는다.

  저기 그러니까… 이 많은 사람 다 보는 앞에서 더빙을 하라는거지? 맞다고 한다. 수치스러움을 얼굴에 덕지덕지 묻히고 허겁지겁 대본을 읽어보는데, 젠장, 주최 측에서 내가 보던 대본을 걷어가고 글씨 크기와 대사 위치가 달라진 대본으로 다시 배부한다. 으아니, 뭐 이런 극한 시험이 다 있어?! 및-취겠다. 그리고 정말 믿을 수 없는 지점. 그 와중에 나는 이 대회의 상금이 얼마인지 궁금하다. 자기 전까지 한 달에 150만 원을 만들어 줄 알바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다 꿈이라는 얘기다. 이건 오늘 내 악몽 리스트에 추가된 새로운 꿈이다. 뚀료룡~! 


  거지 같은 기분으로 동태 눈을 뜨며 일어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아무래도 나는 궁극의 시뮬레이터인 것이 틀림없다.

지겹게 이런 종류의 꿈을 꿔 대는 건 일종의 초능력이다. 이 초능력 때문에 나는 그동안 잠탱이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 역시 그랬던 거였어…. 이제야 아귀가 딱딱 맞네.

수면양말을 신은 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뒤꿈치 부분이 발가락에 와 있었다.

  하… 이거 아주, 잘하면 마블 영화에도 나올 수 있는 히어로 같으니까 이름을 지어버려. 뭐라고 할까… 그래. 시소우신(see-saw-seen). 궁극의 시뮬레이터, 시소우신이다. 


  나 시소우신은 과거의 나쁜 경험과 뼈아픈 기억을 꿈으로 소환하는 능력을 가졌다. 처음 이 능력을 시험하는 날, 마스터 스승이 나한테 말해줬을 거다. 그것도 꿈에서였던 건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히 이랬겠지. 민머리 빛내면서.

  괴로울 수 있, 아니, 괴로울걸세. 기억하게. 꿈이라는 걸 잊는 순간 모호든게 끝나!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네. 그래도 하겠나?!

캬, 클리셰. 하지, 해, 해야지. 나는 샤랄라 눈을 감고 능력을 폭발시켜 꿈속의 과거에 풍덩 빠진다. 그리고 기억의 틈을 찾아 헤엄친다. 기억이란 항상 기억 소유자의 관점만 존재하기에 온전하지 않다는 맹점을 찾아 파고들면, 순간들을 분해하고 재정렬할 수 있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사건으로, 대처할 방법이 있었던 사건으로,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과 관점들까지 제시하면서. 기억의 힘이 커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작업은 마무리 단계다. 나는 “푸-아아! 아씨아-꿈!” 하면서 깬 다음, 모든 게 지난 일이라는 걸 온몸으로 깨닫는다. 나는 지금 여기에 와 있고 안전하다는 것을 몸에 새긴다. 그러면 작업 끝. 나는 이런 방식으로 끔찍한 사건들 몇 가지를 덤덤히 말할 수 있는 기억으로 다루어둔 거다. 


  과거를 다루는 것에 비하면 오늘 꾼 꿈 같은 것은 가벼운 작업이랄까. 오늘 더빙 수업을 앞두고 준비가 안 되어있으니까 아주 겁시나게 불안했던 것 같다. 이런 류의 두려움은 오늘처럼 시뮬레이션을 통해 없애는 거다. 더빙 수업이 너무 무서우니까? 아예 더빙 대회장에 가버리는 거지. 정말 나는, 너무나 극단적이고 대담한 시뮬레이터야! 아, 시소우신. 현재와 과거(와 과거분사) 만 다루는 게 아니라 미래에 올 일까지 다루는, 이거 잠깐, 닥터 스트레인지랑 캐릭터 조금 겹치는데, 뭐, 아무튼 비슷한 급의 술사인 것이다. 응~ 내가 걔라구요. 

그리고, 너도요.

뇌 있는 우리 모두가요.

우리 쥐 친구들도 똑같대요. 


요컨대 꿈의 논리는 미래의 다양화를 포함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늘 다시 대안들을 권유받는다. p.118

우리가 회상할 때, 기억 흔적들은 다시 불안정해지고 (즉 유연해지고) 다음 단계에서 다시 굳어진다. (…) 트라우마를 겪은 상황을 위험 없는 최신 상태로 업데이트 하기위해 감정이 실린 기억이 현재와 뚜렷이 대비되도록. p.203.

_ 한나 모니어, 마르틴 게스만 지음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  


  뇌라는 건 너무 신기해. 우리 뇌는 자는 동안 재학습을 하는데, 경험한 일을 조금 더 빠르게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꼭 꿈이 아니더라도 몇 배속을 돌려서 재학습. 그걸 rewriting이라고 부른다니까, 말하자면 덮어쓰고 다시 쓰고 보완하고 생략하고 첨가해가면서 최적의 길을 찾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기억도 그렇다고 한다. 지난 일 A를 기억해낼 때, 뇌는 어딘가에 저장돼 있던 A를 불러내는 게 아니라 A’, A’’, A’’’ 등으로 몇 번이고 다시 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거라고.

왜 다시 쓸까?

배우려고?

이겨내려고?

다른 해석도 있으니 매몰되지 않게 하려고?

그러니까,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서?

내 뇌가 매번 이렇게 나를 위해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자면 짠하고 고맙고 대견스러워져 팔이 네 개였으면 좋겠다. 완벽하게 끌어안아 주게. 


어떤 트라우마적 기억은 내 몸에 이렇게 남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뇌와 몸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은, 어떻게 생각하면, 내 몸이 이 고통을 안고 포용하고 삶으로 나아가려는 그런 의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내 몸을 한 번 믿어보세요. 그리고 이 아픔과 고통을 내 몸으로 한 번 드러내보세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우리는 때로 돌아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_마보 대표 유정은, 마보 앱 중에서


  꿈은 내 뇌의 작동방식. 자꾸 떠오르는 기억들은 내 삶에 일어난 사건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과정. 눈 뜨고도 악몽을 꾸는 내 마음에 잘게 돋은 가시들이 녹는다. 과거의 일들이 나를 자극하고 끌어당긴다면 그건 퇴화나 퇴보가 아닌 새로운 구성이자 이해, 적응에의 노력 같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나 열렬히 살아있다. 


  오늘 어떤 꿈을 꾸셨나요? 시뮬레이션 돌려 보셨나요? 밤새 고생하셨구요. 자는 동안에도 열일한 우리의 초능력에 엄지를 들어주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는 걸로 해요. 터미네이터처럼. I’ll be back. 그래, 와라 악몽아. 난 꿈속에서 죽지 않고 몇 번이고 살아온다!

  좋은, 아침입니다. 정말로 좋은 아침이에요. 저는 그럼, 아직 안 한 성우 학원 숙제하러 갈게요. 네네, 맞아요. 말했잖아요. 오늘 더빙 수업이에요. 시뮬레이션 진짜 끝내줬죠?   




20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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