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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Apr 19. 2023

시궁쥐의 요리

나는 한 번씩 죽음의 스프를 끓여


  아침에 일어나 연 밥솥. 아~ 밥 냄새… 스아십-구-싀-간-된 븝.늠.새. 으익! 분명히 밥이 이 지경인 걸 봤을 건데 이걸 왜 그냥 둔 거야? 와, 진짜 너무 무심하다. 나를 너무 안 도와준다 너-무 안 도와줘! 눈알을 심하게 굴리면서 쌀을 씻는데 보이는 빨래 나무. 아니, 저 빨래는 도대체 왜 맨날 내가 개는 거야? 너는 것도 내가 개는 것도 내가 하냐? 나는 뭐 시간이 많아서 집안일 하냐? 가만두면 2주가 넘도록 청소기 한 번을 안 돌려, 저, 저 먼지 굴러다니는 거 봐, 저거. 내가 진짜 하루 이십사! 시간이 모자라게 바쁜데 진짜 이래야겠냐?


  뇌 회로라는 게 참 이상하지. 물꼬 한 번 터 주면, 내가 튼 게 물꼬가 아니라 철로인 것 마냥 칙칙폭폭 비슷한 것들이 뇌 주름을 타고 줄줄이 등장한다. 지나온 삶의 어두운 단면만 찍은 전시회가 열리고, 나는 그걸 차례로 관람하다가 이상한 데서 폭발하고 만다. 아니 근데 이 사람은 왜 또 연락이 안 돼! 일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앜?!


  그래도 나도 전두엽이라는 게 있다. 주제를 좀 바꿔서 새로 전시회를 열어보려고 애를 쓴다구. 그런데 쉽지 않다. 하, 뭐. 오늘 하늘 예쁜 게 뭐. 참내, 그게 뭐! 그게 뭐 그렇게까지 감사할 일인데, 뭐가 고마워. 남들 다 저 하늘 아래 살어. 야 씨, 그래 말 나온 김에 얘기 좀 해보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이거 봐, 이거 사진. 얼마나 열심히 살었냐고 내가. 근데 이거 봐, 얘 보여? 얘 지가 더 이상하면서 나 이상하다고 했지. 얘 봐, 얘. 얘 나 등쳐먹고 홀랑 튀었지, 얘는 손해 본 게 없어~ 얘는 또 어떤데? 얘는~ 일을 그따구로 하는데도 돈 벌어 먹고산다고. 근데 왜 나만 망했어, 왜! 왜 나만 망했냐고~!!!


  오우 제발…! 이게 일 안 풀리는 사람의 흔한 뇌 운동 루틴이라고 누가 말해주면 위로가 될 텐데… 아니다, 제가 말해드릴게요. 저 일 잘 안 풀리는 사람이고요, 저 이래요. 당신도 그렇다면 위로받으쇼.



  발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날. 지금 이 순간과 이 자리를 견딜 수 없어지는 날.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늘 하루치의 뭔가뿐인데, 형체도 없는 누군가가 나에게 그것 말고 더 큰 걸 내놓으라고 협박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 날. 나는 내가 영원히 무능할 것만 같아 두려워진다. 이런 날 내 안에 사는 시궁쥐는 요리를 한다. 메뉴는 딱 하나다. 스프. 보라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고 약간... 그 슈렉이 뱉은 침일 것 같은 초록색도 언뜻언뜻 보이는 꾸덕한 스프. 게다가 그 스프가 보글. 뿅. 보글. 뿅. 끓을 때마다 누군가의 뼈도 한 번씩 올라오는 것 같다. 누, 누구의 뼈일까...? 아까 말한 걔네들? (몇 명 더 읊을 걸 그랬을까?) 부글부글 끓는 그 스프 위로 조명이 하필 빨간색이어서 비주얼이 무시무시한데, 시궁쥐가 자꾸만 스프를 한 접시씩 떠서 내 앞에 갖다 놓는다. 드세여. 제공하신 재료로 만든 스프입니다아. 일단 배가 고파서 먹고, 속이 끓으니까 먹고, 열이 받으니까 이열치열…. 아, 근데 먹을 때마다 속이 더 끓는 것 같애. 이미 스프에서 나오는 유독가스로 마음이 검게 찼다. 하루를 온전히 살기가 힘들어진다. 내 안에 사는 시궁쥐가 라따뚜이 레미면 좋을 텐데. 아무리 봐도 얘는 먹을 만한 요리를 만드는 데는 재주가 없는 것 같다. 으엑, 쓰다 써. 이 레스토랑 진짜… 너무 후지다. 어흐으으으. 속이 뜨거워져 눈물도 나지 않는다. 아, 시궁쥐가 스프 끓이는 날엔 날 내가 뭘 할 수 있나. 하던 거 다 때려치우고 유독가스 맡으면서 우는 것 말고 말야.


  환기를 해서 가스라도 좀 내보내고 싶은데, 창을 열고 싶은데, 또 열고 싶지 않아. 이게 무슨 미친 소리냐 하면 유독가스를 너무 마신 거다. 창문을 열어야 돼, 열어야 돼,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고서 눈으로는 내가 스프가 보글. 뿅. 보글. 뿅. 하고 올라오는 걸 멍하니 보고 있다. 일면… 편안하기까지 하다. 아… 다… 죽어버려….


  이럴 때 창문 여는 방법으로 몇 가지 알아둔 게 있는데 오늘은 그중 하나도 먹히질 않았다. 청소, 목욕, 걷고 오기, 물건 버리기… 특히 ‘걷고 오기'는 길 따라 걷는 동안 눈물이 나서 찔찔 울었기 때문에 더 비참스러워졌다. 그렇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 기분 전환을 위한 무엇도 하지 않는 것.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꾸역꾸역 해야 할 일을 하기. 나는 방으로 들어가 목 풀면서 아아아아(도레미파) 히아아아(솔라시도) 울고, 책을 펼쳐 <애매한 나를 견디는 일> 파트 낭독하면서 끄엉컥 끄엉컥 눈물 훔치고, “내가 이걸 왜 하는데 지금 이 와중에~!~!” 울부짖으면서 외친다. 왜 하필 성우학원 더빙 숙제가 프리큐어야. “트-로-피-컬 하자~!”


  오늘 낭독한 책을 쓴 작가가 그랬다. '불안과 부정적인 예감에 사로잡혀 투덜거리면서도 꾸역꾸역 당장 할 일을 하는 사람은 멋지다'고. 오늘 내 얼굴은 분명 멋진 것과는 좀 거리가 멀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죽어라 연습 시간을 채우고 나니 남는 건 이런 것뿐일 거라는 감각이 슬며시 발을 내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가볍게 툭, 창문을 열고 간다. 막혔던 숨이 트인다.


  생각해보자. 오늘 남은 건, 청소해서 깨끗해진 집, 박박 씻고 바디로션까지 발라서 개운해진 몸, 걷고 와서 풀린 다리, 그리고 연습해서 트인 목이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분했던 마음은 당장 내일만 돼도 또 새로운 감정들로 모습을 바꾸고 머물다가 사라질 것이다. 그건 날아가는 것이다. 있다가도 없는 것. 없다가도 있는 것. 왔다가 가는 것. 갔다가 오는 것. 그리고 내 마음속 시궁쥐한테도 요리 지능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있을 거야. 얘도 요리가 늘 거야. 별 다섯 개 받을 날도 오겠지.

  요리사의 날 같은 게 다가오면 꼭 얘한테 산뜻한 앞치마를 사 줘야겠다. 오븐용 장갑도.





시궁쥐의 레시피 최초 공개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시궁쥐입니댜. 어느 시궁에 사냐구 물으신다면~ 에이, 네 마 음 속! 너~무 서운해요. 모른 척 하지 말아요~


  오늘은 저의 레시피를 아주~ 처음으로 공개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좀 떨리네요. 다들 좀 먹기 싫다구 그랬던 음식이기 때문에…네. 하지만 속이 부글부글 거릴 땐 꼭 이 스프를 찾는단 말이에요. 누가요? 아이, 당신이요. 이게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데, 한두 그릇 정도는 괜찮아요. 부글거릴 때 불 지피는 역할도 하구여. 이렇게 한 번씩 푹 끓여줘야, 묵은 재료들도 쓰구….


  아무튼 자~ 이 스프에 제가 뭘 넣는지 잘 보세요. 사실 재료가 좀 비밀리에 배달됩니다. 제가 사는 이 시궁은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좀 안 보이는데 있어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 뭐 눈에 띄어도 모른 척 하시고들 그러지여? 재료가 쌓이면 저는 스프를 만들 수밖에 없어요. 여기 이 시궁도 그렇게 공간이 넉넉하지가 않거든여. 오늘은 그냥~ 재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고생 좀 하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자잘한 것까지 모아서 보내는지, 나 같음 찾을래도 못 찾아 이런 건. 예? 아니~ 자기가 실패했던 것만 그냥 쪼그만 것 까지 다~ 찾아가지고 싹 다 여기로 던졌다니까요? 손톱만 한 것까지. 아유, 그런 것 쌓이면 여기 답도 없어요! 빨리 다 끓여버려야지.


  아, 이거여? 이거 이 초록색은 어떤 이상한 사람이 지가 더 이상하면서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대요. 그 눈빛입니다. 꺄으~ 넣어넣어. 이 뼈다귀는 사기꾼거. 아이그, 뭐 그런 사기를 쳐, 사람 맞어? 고아고아, 고아버려. 그리고 이, 이 특유의 점성은 어떻게 나오는거냐면, 사람이 살다보면 아주 찐-득거리게 달라붙는 그런 말들이 있어요. 뭔지 알져? 참, 사람들이 말을 하려면 좀 담백하고 깔끔하게 할 것이지, 꼭 그렇게 아스팔트 타르 들러붙는 것 마냥 드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꺄으~ 다 넣어넣어. 아유, 그러면 스프가 전체적으로 보랏빛이 돼요. 예~? 향신료~? 허브~? 에이, 그런 거 안 넣어요~ 이거는, 이 스프는 그런 거 넣어봤자 맛에 조금의 기별도 안 가여. 이건 그냥 있는 그대로 끓여야 돼요. 끓여서 몇 접시 내 주고, 남는 건 환기만 잘 시키면 호롤로 날아가요.


맛이요~?

아아… 중요한 말씀이네요. 사실은 말씀이지요. 재료가 매번 비슷비슷해서 맛이 항상 좀… 그래요. 이건 요리가 늘 수가 없는 환경이에요. 성장이 없지. 재료가 이따위인 걸 뭐. 아, 튀김기요? 없어요. 튀기면 다 맛있어지는거 나도 모르는 건 아닌데, 여기는 튀김기는 없어요. 오븐도 없어. 무조건 다 넣어. 끓여. 고아.


아유~ 나도 이제 배고프다.


네? 저요?


네? 저는 이거 안 먹져.


전 핏쟈 먹어요.



20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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