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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Apr 26. 2023

오래된 만두가게

나를 기다리는 나에게

  시즌 1만으로도 너무나 완벽해 시즌 2부터는 볼 엄두도 나지 않았던 드라마 <킬링 이브>의 시즌 3는, 주인공 이브가 만두가게에서 만두를 빚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든 걸 잃은 이브가 만두 가게에서 만두를 빚고 있다.’


어떤 면으로 이브가 참, 한심한 생활을 이어 나가는 것 같은데 전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이브는 차분하고 익명성이 있는 곳으로 후퇴한 거죠. 이브가 컨트롤할 수 있는 삶으로요. 이브의 삶을 정의했던 외형적인 것들이 무너지고 사라졌죠. 그래서 이브는 어릴 때 먹고 자랐던 음식의 정수, 모국어의 정수로 돌아가요. 그 지점을 이야기에 녹여내고 싶었어요. (…) 이브가 말을 아끼고 평온한 모습을 보게 되죠. 홀에서 일하는 걸 거부하고 오히려 뒤쪽에서 익명성이 있는 곳에서 편안해하는 모습을 보죠. 사실 이브는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거예요. 이브는 강인해요. 이브는 그 모든 단순함, 침묵, 고독, 그리고 술이 필요해요.

_ 왓챠 <킬링 이브> 샤론최&산드라오 인터뷰 중에서


  나는 이브를 연기한 산드라오가 인터뷰에서 한 앞의 말들을 마음에 꼭 품었다. 그리고 내 삶이 그저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기만 한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이브의 만두가게를 상상한다. 만두가게의 위치를 알려주는 팻말, 가는 길에 깔린 보도 블럭, 그 사이로 돋은 부드러운 이끼, 가게 처마 밑에 달린 조명의 색깔, 오래된 문에서 나는 문소리, 헤진 메뉴판에 실린 만두의 종류, 만두를 만드는 주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주방 집기들, 찜기 위로 올라오는 뜨거운 김과 납작한 만두를 튀기는 냄새까지…. 그러다 보면 그 가게에 앉아 만두는 빚는 게 이브가 아니라 내가 된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지 모른다. 내가, 이 오래된 만두가게의 구석진 주방에 앉아 만두를 빚는다. 말없이. 꼭꼭 눌러 터지지 않게. 달리고 넘어지고 깨지고 점프하고 또 일어나 뛰는 대신, 같은 자리에 오래 머물며 만두를 빚는다. 만두 외의 다른 것은 생각지 않으면서.


  애초에 삶에 회복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도 없고,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는데. 원치 않는 일들이 닥치는 걸 운명이라고 하는지, 신의 뜻이라고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속수무책으로 견디고 나면 사람이 뻣뻣해진다는 것만 안다. 다시는 눈 뜨고 코 베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주도권은 내가 쥐겠다고 버티는 마음이 들어차면 뻣뻣해진다. 그러면 그런 상태로는 숨 쉬는 것도 편히 할 수 없는 거다. 안 뺏기겠다고 힘줄수록 뺏겼다는 감각만 선명해지는 거다. 그냥 벌어진 일을 그러모아 끌어안고 나아갈 뿐. 터진 옆구리에 남은 상처를 매만지며 앞으로 나아갈 뿐. 그래서 만두를 빚는 거다. 조용히 앉아서. 옆구리가 터지지 않게 몇 번이고 연습하면서. 소를 알맞게 넣는 법을 익히면서. 맛있기만을 바라면서….


  “삶을 정의했던 외형적인 것들이 무너지고 사라졌죠. 나는 차분하고 익명성이 있는 곳으로 후퇴했어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삶으로요. 나는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강인해요. 나는 그 모든 단순함, 침묵, 고독, 그리고 술이 필요해요.”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내 삶이 내 손등 위로 부드럽게 날아들 때까지.




20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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