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이 아닌 예방을 위해
저자는 ‘정상 가족’이라는 허상이자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을 대변한다. 이 과정에서 ‘압축적 근대화의 해결사’로서 사회가 가족에게 전가한 책임과 이로 인한 폭력성 등을 설명하며,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부조리함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칫 진부해지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가족이라는 집단을 아이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든다. 단 한 번도 가족을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20대 중반인 지금도 나를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부모 비슷한 역할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항상 ‘아이’였으나, 정작 ‘아이’로서의 시각은 부재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관점의 전환은 이의가 깊다. 아이들의 행복과 주체성에 관한 고려가 사회 전면에 부재함을 보여주는 첫 번째 지표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그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과연 비현실적인 욕심일까? 이 책은 그 욕심이 비현실적일지언정 마땅히 가져야 할 욕심이자 책임임을 가르쳐준다.
아이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초대받아 성인과 종류만 다를 뿐인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여린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아이도 국적과 부모 등의 환경을 직접 선택한 채 태어나지 않는다. 온전히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세상에 태어나,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어른들의 욕심으로 험난한 세상을 마주하게 했다면, 적어도 가정에서만큼은 그 세상과 맞서 싸울 힘과 안정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지니는 최소한의 도리인 것이다. ‘도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효’의 도리만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선택에 의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가 다해야 할 도리 역시, 효의 도리만큼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부자가 아니라면, 또 아이를 위한 완벽한 환경을 갖추지 않았다면 부모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자신들의 의지로 세상에 여린 존재를 태어나게 했다면 적어도 가정에서만큼은 정서적 안정과 응원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자본은 현대 사회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가족들과의 진실된 시간이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믿음이다. 그 돌아갈 곳이 10평짜리 집인지, 6성급 호텔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저자가 책 전반에서 강조하는 체벌 금지법의 제정이 절실한 이유이다. 체벌은,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가해지든 간에 아이들에게 위협이 된다. 그 위협은 행복과 안정을 주는 가정을 지우고, 세상에 아이들을 내던진다. 가장 기본적인 집단인 가정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게 된 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진다. 아이들이 어긋난 곳에서 안정을 찾으며 일탈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아이들은 그 자체로 주체로서 인정받아야 한다. 책에 의하면 과보호와 방임 등의 학대는 “아이를 독립적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소유물로 바라보는 같은 뿌리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학대를 통해 아이는 주체성을 상실한 채 길러진다. 사회 역시 공범이다. 공교육 기간 내내 개별 아이들의 개성을 지우고 획일화된 길만을 좇도록 강요하고 있지 않나. 나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존엄과 주체성이라 생각한다. 주체적인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자율적 선택은,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엄을 위해 필요한 주체성을 가정과 사회가 나서서 억압하고 제거시키고 있다니, 정말이지 ‘학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삶은 선택의 결과이다. 그런데 선택할 능력을 만들 기회를 주지 않으며(방임) 어른들의 선택을 강요하기만 한다면(과보호), 아이의 삶은 결국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탐구할 때 아이들의 주체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른들의 일방적인 판단에 의한 ‘좋은 것’들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들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지 않게끔 해줘야 한다. 아이가 그저 아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보편적인 슬픔과 나쁨들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른들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획일화된 길을 제시하며 이 길이 ‘좋음’이라고 이야기하거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치하는 것이 아닌, 작은 인간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인간의 작음을 이해하며 배려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명언이 있다. 책에 등장한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라는 말을 보자마자 이 말이 떠올랐다. 두 문장은 모두 최소한의 도리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피나는 노력을 수반하는 선행이 아닌, 적어도 인간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감의 제도화”를 이야기하는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공감’이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나 역시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인’을 실현하거나, 역지사지의 자세를 갖춰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자연스레 공감을, 특히나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는 마주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공감을 사회가 나서서 제도화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공감’을, 정책과 규범이라는 가시적인 형태로 제시한다면 접근도 실현도 더욱 쉬워지지 않을까? 이는 가정의 문제를 개개인의 가정으로 돌리지 않고 사회적 측면에서 해결하려는 뜻깊은 시도이다.
저자의 모든 설명이 현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스웨덴을 사례로 드는 것에서 현실과의 괴리가 느껴졌다. 스웨덴과 한국의 사회와 문화, 사람들의 사고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저자가 내내 강조했듯이 압축적인 근대화를 거쳤고 그로 인한 부작용을 여러 방면에서 앓고 있다. 이 부작용은 많은 사회적 요소들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심화 되었다. 그러므로 스웨덴을 본받아 ‘체벌 금지법’을 도입하는 것은, 물론 너무나 필요하고 의미 있는 시작이 되리라 믿지만,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이미 복합적으로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장애, 다문화, 성차별 등등의 여러 방면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측면에서, 마냥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스웨덴이 아닌 아시아권의 다른 국가가 사례로 등장했다면 이해와 비교 모두 더 수월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이 책은 짧은 사회 과학서인 탓에 이론적 논의에서 그쳤지만, 우리는 가족을 대할 때 이론만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사회를 향해 이상적인 이론만을 강조하다 보면 그 사회 속의 사람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객관적’으로 ‘옳은’ 것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항상 양면성을 지님을 명심해야 한다. 약자를 대할 때 이론에만 치중한다면, 이론 자체가 ‘비정상’ 집단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는 6살 아이가 엄마와 함께 허름한 모텔 방을 집 삼아 생활하다 이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위해 각종 불법적인 판매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지자 아이가 목욕하는 사이 몰래 성매매를 하며 돈을 번다. 그러다 경찰에 신고를 당하고, 미국 아동국에 의해 딸과 이별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친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며 아동국 직원에게서 울며 도망친다. 이 이별은 유독 가슴이 아팠다. 책에 의하면 “태어난 원래의 가정에서 무리 없이 자라는 것은 아이에게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원리”이며,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그 아이의 최선의 이익을 고려하며 상황을 교정하는 것이 국가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나 중요한 첫 번째 원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진작 도움을 주지 않고 국가는 무엇을 한 것일까? 왜 첫 번째 원리가 망가지고 나서야 등장한 것일까? 영화 속 아이에게 그 환경이 결코 좋지 않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고, 아이가 엄마와 행복하다면 대체 무엇이 옳은 것일까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아이들을 얼마나 잘 ‘구조’하느냐가 아니라, 아이가 원래의 가정에서 행복하게 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수습이 아닌 예방이 필요하다.
저자는 출판 이후 2019년 2월 7일에 여성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희망이 보인다. 앞으로는 사회가 나서서 공감을 제도화하고,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 믿는다. 저자 말마따나 우리는 “인류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기대”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조금 덧붙이고 싶다. 아이들의 세상은,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아이들은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영향을 받고 주변의 어른을 모방하며 자신을 만들어낸다. 이 작은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세상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이 무거운 책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거대하게만 보이는 사회 역시 개인의 집합임을 잊지 말고, 개개인의 발걸음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 세상을 살 아이들의 행복을, 비현실적인 욕심일지라도 맘껏 기도해야 한다. 인도 작가인 루피 카우르의 시를 덧붙이며 글을 마친다. 페미니즘적인 이야기이지만 아이들을 대하는 맥락에도 완벽히 들어 맞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서 살았던 수백만 여성들의 희생을 딛고 서서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산을 더 높게 만들어서 나 이후에 살 여성들이 더 멀리 보게 할 수 있을까.”
덧,
이 서평은 작년에 작성했고, 그닥 맘에 드는 글은 아니라서 혼자 간직하고 있었다. (책을 안 읽은 사람까지 이해시킬수 있는 글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무튼, 그러는동안 이 미친 세상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냥 올려본다. “이상한 정상가족.” 갈수록 뜻깊어 지는 책.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