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페퍼톤스 : 긴 여행의 끝
초등학생 때 무한도전을 좋아했다. 유재석이 너무 좋았고, 김태호PD가 너무 멋있었다. 그래서, 단지 무한도전이 너무 좋아서,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었다. 이런 나를 위해 부모님은 MBC 투어를 시켜주셨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의 높은 건물들과 방송국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공기. 티비로만 보던 그 "홍카"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는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이때 산 무한도전 굿즈들은 아직까지도 내 방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사춘기를 거치며 꿈이 아무리 바뀌어도, 가족들이 기억하는 내 꿈은 항상 PD, 작가, 뭐 그런 거였다.
중학교 때는 록스타가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진지하게. 음악을 많이 들으면 음악을 잘하게 될 거라 믿었던 때의 이야기다. 매일 밤, 거창하게도, 글래스톤베리 같은 곳에 서있는 나를 상상하며 잠에 들었었으니까. 이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꿈이란 걸 알아차린 건 고2 정도였고. 그때부터는 뭐랄까, 시종일관 우울했던 것 같다. 명확한 꿈이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은 그런 것이니까.
어렴풋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음악 한다며 부린 객기를 수습하기에는 고3과 재수만으로도 벅찼다. 그렇게 신기루 같은 꿈을 뒤로한 채 대학에 왔다. 당장 서울에서의 삶은, 그저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종류의 것이라 꿈에 대한 고민들은 사치였지만. 나를 울리는 것들이 글이고, 그림이고, 음악이고, 하여튼,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냥 무식하게… 무한도전 라디오스타 편을 봤는데,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라디오 스테이션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있는 정형돈을 발견했다. 한두 번 본 화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심장이 요동쳤다. 그 순간 그냥 알 수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난 저걸 해야겠구나 하는 확신.
그래서 무턱대고 작가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동기들은 모두 현장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휴학생이라는 어정쩡한 신분은 나 하나뿐이었다. 와중에 많은 동기들은 아카데미 수강 도중 취업에 성공해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다. 늘 그렇듯,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 누구보다 간절했다고는 자신할 수 없어도, 그 누구보다 요령 피우지 않고 우직하게 했다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런 멍청한 태도는 결국 눈에 띄는 건지, 졸업도 못한 나를 막내로 써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난 항상 내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나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인 줄로만 알지만, 이건 정말이지 과분한 일이었다.
그렇게 오늘이 왔다. 주말은 반납, 야근은 일상이다. 며칠 밤을 새워 만든 자료조사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기도 하고, 굽실대며 섭외를 위해 전화했던 곳에 취소 통보를 해야 하는 일도 많다. 회의 시간에는 회의록을 적는데, 모든 말을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 그런 와중에 PD님께서 던지신 한 마디를 붙잡았고, 내가 찾아둔 곳을 제안했다. 주어진 일의 2-3배는 찾아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제안한 곳이 채택되어 답사까지 다녀왔고, 곧 촬영을 떠난다.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을 만큼 짜릿하다. 일개 막내의 제안을 받아주는 선배들의 대단함 역시 실감한다.
까만 여름밤 퇴근길에 페퍼톤스의 노래를 듣는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커다란 방송국 건물들이 보인다. 나는 지금 상암동에 서있다. 어릴 적 꿈을 잊지 않고, 용케 이 자리에 서있다.
솔직히, 이 일이 아니면 죽겠다, 싶은 확신은 없다. 그런 확신이 드는 순간이 과연 존재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 거 다 허상 아냐? 난 그냥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이 사무치게 기특할 뿐이다.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걸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이 일이 재밌다. 그거면 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