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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공책 Jul 31. 2022

록산 게이, 헝거

그리고 이건 내 몸과 나의 역사


 지금부터 내가 적는 것들은, 거북할정도로 사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기괴할정도로 공적인 이야기다. 내가  몸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들, 인정하기 부끄러운 수치심과 납득하기 어려운 욕망은 그런 것이다.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

 '아니? 나는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든다면, 정말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 당신만이라도 자유로워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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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거는 록산 게이의 책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와닿지 않겠지. 록산 게이는 190cm가 넘고, 200키로가 넘는 삶을 살아온 여성이다. 헝거는 그녀의 일대기다.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이야기를 하며, 가장 먼저 적는 것이 그녀의 몸에 대한 수치라니. 하지만 이 숫자를 모르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또 하나. 헝거는 지상에서 가장 용감한 고백록으로 불린다. 동의한다. 그녀는, 미치도록 사무치고 잔인한 이야기들을, 독자가 그에 매몰되지 않도록 풀어내는 능력을 가졌다. 대단한 능력이다. 책에는 분명, 부정적인 감정에 덩달아 삼켜져 눈물이 흘러도 모자랄만한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그런데 책은 사실, 슬프기는 커녕 유쾌하기 까지 하다. 록산 게이가 가진 힘이다.


 헝거는 성공 서사가 아니다. 200키로의 몸에서 탈피해, 마침내 정상 체중으로 편입한 그녀가 이제는 커져버린 바지를 들고 달라진 삶에 대해 고백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바디 포지티브를 외치기만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고 있다. 믿고 있다.


 : "여성을 비현실적인 이상에 구겨 넣으려 하는 천편일률적인 미의 기준이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다양한 체형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의 미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세세한 부분까지 바꾸려 들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동시에 그녀는 덧붙인다.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가치는 내 옷의 사이즈나 외모에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 (믿고 싶다)."


 믿고 싶다는 저 말이 어찌나 든든한지 모르겠다. 그 천재적인 록산 게이도, 모든 걸 깨닫고 자유로울 것만 같은 그녀도 아직까지나 그 믿음을 찾고 있다는 것이, 나를 사랑해도 된다는 믿음을 갈구하는 내게 얼마나 든든한지. 그치만 동시에 화가 난다. 그렇게 똑똑한 그녀도, 아직까지도, 그 믿음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 미치도록 부당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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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몸을 사랑한다. 동시에, 그 무엇보다 내 몸을 저주한다.


 우리 집 거실에는 전신 거울이 있다. 몇년 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어떤 날은 거울 속의 내가 너무 사랑스럽다.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가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다. 살은 쪘어도 허리가 들어가있고 골반이 나와있어, 옷만 잘 입으면 흔히 말하는 외국 언니들 몸매인 척 할 수 있다며 진심으로 안도한다. 내 몸무게를 들으면 "절대 그렇게 안 보여!" 놀라는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역시 그정도로 보이지는 않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기분이 정말 좋은 때면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사랑해야 해.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이 나쁜거야." 그리고 입고싶은 옷을 입는다. 뚱뚱한 여자들은 입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옷들을 입는다. 그렇게 세상에게 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몸을 사랑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어떤 날은 거울 속의 나를 죽이고 싶어진다.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는 나를 너무 둔해보이게 만든다. 허리를 둘러싼 튼살들과 옷으로 묶어두지 않으면 흘러내리는 살들이 원망스럽다. "절대 그렇게 안 보여!" 그렇겠지. 진짜 무게들은 다 가려져 있으니까. 지독히도 내 체형을 잘 아는 탓에, 가슴을 노출하고 허리를 강조하며, 이 몸을 최대한 잘 포장하며 살아가고 있거든 나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과 함께 거울에서 눈을 피한다. 순식간에 나는 죄인이 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정상 체중으로 살아가던 때를 생각한다.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야만 한다. 돌아가지 않으면 행복해질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오늘도 생각한다. 나는 내 몸을 저주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저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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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다이어트의 역사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한다. 그때의 무게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지금보다 가벼웠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남자친구를 원했다. 그래서 살을 뺐다. 무식한 방법으로 뺐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치켜올렸다. 모두가 내게 와서 비결을 물었다. 다른 반이었던 모르는 아이들까지도 나를 보며 수군댔다. 여자 중학생 무리에서 나는 승리자였다. 내 손으로 인생을 바꾼 대단한 아이였다. 그들 앞에서 나는 말했다. 한창 클 때였던 아이들은 내 말을 선생님 말처럼 들었다. "하루에 한끼만 먹는게 중요해. 그렇다고 밥은 안되고, 고구마 같은 걸로. 배고프면 물 마시면서 버텨. 아, 박봄 다리 운동도 해야해."


 그렇게 살을 빼고, 나는 시청에 있는 음악 학원에 등록했다. 우습게도, 무거운 몸을 가졌을 때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 그리고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누구보다 멋져보이던 음악하는 오빠는 내 가슴을 몰래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중딩 가슴 클라스." 뭐 이런 말들과 함께. 나는 화를 내는 방법을 몰랐지만 무언가 해야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용기내 왜 그랬냐고 묻는 내게 그 오빠가 건넨 말을 여전히 기억한다. "지수야.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래. 잘 생각해보면 화 낼 일이 아니야. 자랑스러워 해야지." 지금은 그 오빠의 얼굴도 이름도, 우습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말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고등학교가 시작되며 살이 조금 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165cm에 65kg이었다. 당연히 날씬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여고생들에게 60은 공포의 무게 뭐 그런거라서. 친구들은 내 무게를 들으면 깜짝 놀라고는 했고 나는 내가 뚱뚱한 편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멀어진, 한 친구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지수야, 너 30키로만 더 찌면 100키로야." 웃어 넘겼던 일인데 여전히 기억은 난다. 그 친구가 잘못했다고,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적는게 아니다. 그녀는 그럴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자랐으니까.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큰일 났다. 나 또 돼지 됐구나."


 어쩌다 한살 많은 오빠랑 사귀기 시작했다. 그 오빠는 나의 가슴을 원했다. 나를 터치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카톡방에서 나는 구경거리였다. 그들에게 나는 가슴이었다.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가슴. 그래도 나는 그 오빠가 좋았다. 뚱뚱한(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던)나를 좋아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했다. 헤어지기 싫었다. 헤어지면 다시는, 누군가가 나를 욕망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뚱뚱하니까. 그때,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스쳤다.  "지수야.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래. 잘 생각해보면 화 낼 일이 아니야. 자랑스러워 해야지."


 나는 그를 용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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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만으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모순적인 두가지의 감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성급한 일반화인걸 알지만 편의상 이렇게 칭한다.

뚱뚱해도 괜찮아. 잘못된 걸 나를 조롱하는 세상이야.  나는 나의 몸이 아니라,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격체야.

뚱뚱한건 괜찮지 않아. 잘못된 건 나야. 나는 나의 몸이야.


 그래서 결국 어긋난 욕망을 품게 된다. 그 누구에게도 욕망될 수 없는 존재인게 두려워서,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욕망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뚱뚱한 몸을 가졌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인격체로서 대우 받기를 원하겠는가. 그저 욕망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누군가가 나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뚱뚱한 여성에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어쩌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자들이라면, 몸무게와 상관 없이 공감할수도 있겠다. 그냥, 우리는 그렇게 배웠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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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도 나는 내 몸과 마음과 싸울 것이다. 이대로도 괜찮다는 마음과, 이대로는 안된다는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내 머릿 속을 채운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이 말에는 거짓이 없다. 동시에 나는 나를 증오한다. 이 말에도, 거짓은 없다. 나는 양립할 수 없는 감정들과 생각들을 동시에 품고 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자며 바디 포지티브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버스에 붙은 광고를 보며 쥬비스 다이어트에 등록하기를 원한다.

 나는 내가 많은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은  성취를 봐주지 않는다. 내가 품고있는 속성들이 얼마나 잘났든, 뚱뚱함이라는 속성은 나의 모든 성취를 가린다. 내가 수석 타이틀을 갖고 있든, 막내 작가 타이틀을 갖고 있든, 백수 타이틀을 갖고 있든 아무 상관 없다. 그래봤자, 나는 뚱뚱한 여성이니까. 내가  카드를 가지고 있는 이상, 어떠한 것도 이룰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정말, 살만 빼면 모든게 달라질거야.

 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를 품고있는 뚱뚱함이라는 속성이 사라진다고 해서, 달라질 건 크게 없다. 그래, 뚱뚱한 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 남긴 흉터들은 내 안에 여전할테니까 말이다. 나를 만드는 건, 몸이 아니라 머리니까, 내 몸이 달라져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침내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인다. 나는 몸이 아니라 머리야, 생각이야, 마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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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평생 사랑을 원했다. 남자든 여자든, 못났든 잘났든 상관 없었다. 그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럴수록 흔들리는  나였음에도 나는 그런 사람을 원했다. 그래서 나를 학대했다. 뚱뚱한 나에게,  기준에 맞는 사람을 고를 자격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던 때의 일이다. 그러다 지금의 남자를 만났다.


 이 남자는 나의 눈을 바라봤다. 나는 남자가 나의 눈을 본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가슴을, 엉덩이를, 내 몸을 보기를 바랐다. 그래서, 무서워서, 상처 받기 싫어서, 내 몸을 내보였다. 그래도 이 남자는 나의 눈을 바라봤다. 싫다고, 믿지 않는다고, 아무리 밀어내고 욕을해도 그저 나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따듯한 눈을 나는 처음 봤다. 씨발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내게 사랑은 생존의 문제였다. 사랑하고 사랑받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세상이 너무 무섭고 나 자신이 너무 싫고 밤이 오면 죽음을 생각하던 때의 나는, 사랑만이 모든 걸 해결할 것이라 믿었다. 물론 그 때의 내가 조금이라도 못된 남자를 만났었다면 어떻게 됐을지도 잘 안다. 사랑은 그런게 아니라는 것도, 지금은 너무 잘 안다. 근데, 그때 몰랐으니까 지금 아는 거다.

 그래서 이 남자를 선택했다. 얼굴도, 몸도, 성격도...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이 남자를 선택했다. 그저 신기해서.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저 마음이 궁금해서. 그리고 지금은, 후회 없이 말할 수 있다. 계속해서 잘못된 선택만 하던 내가 거둔 단 한번의 성공이, 바로 당신이라고. 당신을 만나고 참 많이 잤다. 너를 끌어안고 긴 시간을 잤다. 비로소 평온하다는 생각 덕분이었다. 자는게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밤에 문득 너의 어깨가 손에 스칠 때면, 너를 만나기 전까지의 나는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는 걸 실감한다.

 그렇게 2년 조금 안되는 시간을 함께했다. 아니, 함께하는 중이다. 그동안 나의 몸무게는 엄청나게 오락가락 했다. 지금은 인생 최고 수준이고. 우리가 어디까지 길어질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러다 결혼해버릴 것만 같다. 헤어지면 어쩌려고 이러나 싶겠지만.  일단은, 이런 낯 간지러운 말이 부끄럽지 않다. 얘랑은 헤어져도, 이 기록을 지우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뭐, 다음 남자에게 미안하고 말겠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내가 그 누구보다 무거운 몸을 가졌을 때에도,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변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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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자기애는 허울 뿐인지도 모른다. 남자 하나로  모든 공백을 메꾸려는 부질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너머로 전해오는 온기를 믿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랑으로부터 받은 모든 상처를, 사람과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온기를.

그래서 나는 록산 게이의 희망을 믿는다. 그 희망을 공유한다.


 해결책이 아닌 희망을 노래하는 당신에게  글을 바친다.

가장 용감한 고백을 해낸 당신을, 감히 흉내내본다.

당신에게는 절대 닿을리 없는 언어와 매체로, 당신을 향한 편지를 쓴다.


동시에 나에게 되뇌인다.



언젠가는 그 날이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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