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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공책 Aug 01. 2024

프롤로그

우연을 믿지 않는 사람들


 언젠가 너와 함께 윤슬을 바라본 적이 있다. 캘리포니아의 광활한 바다는 모른 체하고 굳이 작은 반짝임들에 집중하기로 한 날. "노아. 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을, 한국말로는 윤슬이라고 해. 따라 해 봐, y-o-o-n, s-e-u-l." 그리고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윤슬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를 찾지 못했을 때, 나는 덜컥 두려웠던 것도 같다. 너에게 안겨주고 싶은 수많은 말들이 이렇게 흐릿해지겠구나. 내가 쌓아온 이 구질구질한 언어들이 너에게는 꽤 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구나. 



 침묵 속에서 너는 내 손을 고쳐 잡는다. 햇빛을 받으니 꼭 연두색 같아 보이는 너의 눈동자가 나를 본다. 시선 한 번으로 직전의 모든 좌절들을 무너뜨린다. 내가 너를 보지 않을 때에도 너는 나를 보고 있다. 아, 너는 아는구나. 말하지 않아도 아는구나. 너는 나를, 너만은 나를 알아보는구나. 그 순간 나는 안다. 일기장에서도 욕심낼 수 없었던 사랑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갈색 머리를 동여매고, 초록색 눈을 뜬 채로 여기에. 


 우리를 us라고 해야 할지, we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울었던 밤이 있다. 내가 한글과 킬로미터를 쓰고, 네가 영어와 마일을 쓰는 한 우리 사이에는 영원히 뽑아낼 수 없는 작은 가시가 있을 거라 적었던 밤과는 또 다른 밤이었다. 평생 다른 단위로 세상을 계산해 온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의심하던 날. 고작 전화 한 번 거는 게 너무 어려워서 덜덜 떨던 날. 그리고, 그 모든 날들이 아득해진 오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적어야만 한다. 특별할 것 없는 어떤 날, 나는 언어로는 감히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떨어졌다고. 미움, 오만, 의심 같은 건 저 반대 편에 던져두고 왔다고. 


 그 세계에서 우리는 사랑한다. 언어를 초월한 마음을 나누는 세계. 이곳에서도 우리의 다름은 여전하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하기로 한다. 아침이면 나는 국물을 찾고 너는 베이글을 찾을 세계에서, 밥심이라는 말을 평생 이해할 수 없을 너를 아무렇지 않게 사랑한다. 문득 사랑할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 긴 드라마의 첫 시즌을 보는 것이 같은 태도를 전제로 한다는 생각을 한다그쪽에 대한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 인사를 나누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면 그냥 그런 줄 알고 들어야 하지 않나. 계속 봐야만 그 말이 맞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드라마를 쉽게 시작하지 못한다.) 


 사람도 드라마도 함께한 날들이 쌓이면, 그러니까 시즌이 한 6 정도까지 이어지게 되면 피할 수 없는 '정'이 생긴다. 그리고 이제는, 어떠한 영어 단어도 '정'을 표현할 수 없음을 알아서 굳이 인터넷을 뒤지지 않는다. 한국인인 나는 듣지 않고도 '정'을 알고 미국인인 너는 보고 듣고도 '정'을 모르겠지만 괜찮다. 나는 지금 냉동실에 얼려둔 초코파이를 떠올리고 있고, 너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괜찮다. 같은 단어를 알아야만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너는 초코파이가 그리 달지 않다며 이가 녹을 정도로 단 젤리를 씹으러 가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시즌을 계속할 수 있다. 완결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따끈따끈한 8월의 밤에 너의 새끼손가락을 떠올린다. 그 작은 손가락을 꼭 쥐며 칼 세이건의 문장을 곱씹던 순간을 기억한다. "For small creatures such as we the vastness is bearable only through love." 이제 나는 너로 인해 낙하한 세계에 우뚝 서서 너를 본다. 아, 정말이지.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미친 세계를 견뎌내는 방법은 사랑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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