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공책 Apr 04. 2023

쓰고자 하는 마음

배경음악 : 브로콜리너마저 - 꾸꾸꾸

2020년에 적었던 문학 교양 과제물을 2023년에 작가의 서랍에서 발굴함 



-



 언제부턴가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을 쏟아내기 위함이었다. 불규칙하게 둥둥 떠다니는 감정들을 글이라는 그물로 잡았다. 그물에 잡힌 감정들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커다란 원망은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려 버리면 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은 지우개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재수 없지만 프로이트가 또 맞았다. 고통은 어떻게든 마주하는 것이 좋다. 글쓰기는 이렇게 나의 비상구가 되었다. 


  어느새 꽉 찬 일기장이 3권을 넘었고 블로그의 글도 제법 쌓였다. 사람들은 ‘정식으로’ 글을 써보라고 했다. 구구절절 일기만 적지 말고, 그 시간과 노력으로 시나 소설에 도전해 보라며 나를 응원했다. 하지만 나는 문학을 천재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기에 감히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해 배우고 이야기하며 문학은 그렇게 거창한 개념이 아니고,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전의 나는 나의 글과 문학을 철저히 구분했었다. 그러나 내가 쏟아낸 것들이 문학이 아니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문학 속에 있었다. 차마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 조차도.


 문학이 천재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던 내가 스쳐 보냈을 소중한 영감들에 대해 생각한다. 영감이 별거 아니라는 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알록달록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거창하고 대단한 것만이 영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자 나의 글과 나의 삶은 한층 풍요로워졌다. 따분한 일상이 글이 되는 경험을 매순간 했기 때문이다. 그럴때면 트릴링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은 아프고, 예술가는 단지 그걸 표현해내는 탐구자일 뿐이라는 말. 어느새 나는 나를 예술가로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하나씩 미루어지는 동안 봄은 다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해가 바뀌고 매일 한명 이상의 사랑이 죽고 병에 걸리는 일이 계속되면서


마스크는 이제 일주일에 한번만 살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월요일에 약국에 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거리라는 것도 갖게 되었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겨우 생겨나다가 그것은 이제 모두를 위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꽃은 다 져가는 중인데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한 사람만큼의 자리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게 꼭 누군가의 빈자리 같은데요


그럼에도 벚꽃 잎이 비처럼 내리는 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파트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으면 떨어지는 잎들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던 일

그건 가볍고 그건 아름다워서 나는 손을 자주 뻗었고 손등에 내려앉은 꽃잎 몇장을 자주 생각했지만 떨어진 잎은 결국 떨어지게 되는 것이라


결국 아름다운 건 언제나 단 한번뿐이었는데요


그런가 하면 비 내릴 때 물을 잔뜩 머금은 꽃잎들이 달콤한 과일처럼 후두둑 떨어지고 땅바닥에서 빗물이 터지는 이런 날에 나는 침이 고여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삼월이 다 끝났는데도 아무도 시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을 테지만 한번 들은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는 것과 이미 보았던 영화를 돌려 보는 것을 나는 좋아합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과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을 당신의 목소리로 다시 들어보는 일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러다보면 마주치는 사람이 없어 사람이 너무 멀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요 만나지 않아도 헤어지는 사람들이 분명 지금도 막 생겨나는 중인데


나는 천천히 꽃잎을 맞고 있는 중입니다 봄은 계속해서 떨어져가고 있는데요

아마도 이때쯤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가 선물로 주었던 시계를 잠시 말려두려다

어딘가에 두고 돌아와버린 건


아마도 지금일 것입니다 누군가 길가에 가지런히 놓인 벚나무를 따라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건


느리게 날아가는 꽃잎이 그의 등 뒤로 따라가 묻습니다 이게 정말 끝은 아니라는 듯이

길 끝에서 등은 단호한 모습으로 사라집니다 이제 끝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벚나무 밑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머리 위로 가만히 꽃잎이 쏟아져버릴 때”


- 이희형,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름다운 건 언제나 단 한번뿐이었는데요."라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담담하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유한하다고 생각한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써 완결 되기에 아름답다. 삶의 유한성을 인식한 자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유한한 것들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모든 소멸에 절망해서는 도무지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사라지는 것들을 담담하게 얘기하는 것이 마음에 와닿았다. 유한함을 인식하고 이 순간을 긍정하면서도, 그 비참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는 견고함을 배우고 싶다.  

 

 나는 인생이 "비로소!”를 외치며 뒤집힐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내 짧은 삶의 연결사는 항상‘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하지만 글로써 쏟아낸 감정이 문학이 되고, 지루한 일상이 시가 되는 것을 통해 천천히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로소’하고 기다리는 것들은 영원히 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순간 순간들이 내가 그토록 고대한, 비로소 찾아온 순간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문학의 힘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세상을 낯설게 보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니다. 내가 사는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 그 소중함을 보듬어 주고 표현해 내는 것. 그렇게 세상을 긍정함으로써 마침내 나를 긍정하게 되는 것. 문학을 통해 낯설게 보기와 같은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천재성도 아니고, 뛰어난 기술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필요한 건 쓰고자 하는 마음, 그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록산 게이, 헝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