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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 Mar 19. 2023

베트남에서 경험한 억압과 특권

억압적이면서 특권적인 위치들에 대하여

지난여름에 다녀온 베트남 여행이 너무 만족스러웠기에, 이번 겨울 여행도 베트남으로 정했다. 베트남에 유명한 휴양도시 냐짱(나트랑)에 다녀왔다. 냐짱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한국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중요한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냐짱의 바다, 음식, 리조트도 충분히 이색적이고 즐거웠지만 사실 내게 꽤나 익숙한 것들이기도 했다. 해외여행을 적지 않게 다녔기 때문에 신기하거나 놀라운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신기했던 건 관광객들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러시아 여행객과 중국단체 여행객, 가족여행으로 온 한국인 관강객들.


중국인, 러시아인들은 나와 다른 집단의 사람이라는 감각이 강해서인지 그들이 특징적이거나 무언가 다른 행동을 보일 때 그 점이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인 관광객들을 마주치고 그들에게서 불편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거슬리고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예컨대 호텔 조식 식당 줄을 역행하며 음식을 푼다던가, 상인이나 식당 직원에게 한국어, 그것도 반말로 이야기하는 걸 볼 때마다 속으로 이런 질문들을 했다.


"왜 해외여행을 오면서 간단한 여행 영어도 배우지 않는 거지?"

"베트남어로 인사, 음식 이름 정도는 외워야 하는 거 아닌가?"

"정 안 되면 파파고를 사용할 수 있잖아."

"왜 이렇게 식당에서 큰 소리로 대화를 하지?"


한국어로 아무렇지 않게 물건을 사고 음식을 주문하는 관광객을 볼 때마다 혼자 위와 같은 질문들-사실 불평-을 했다. 그들을 무례하고 이기적이고 베트남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문화적 자본에 대한 인지

한국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베트남도 공용어가 영어가 아닌데 굳이 영어를 해야 하느냐고. 생각해보니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영어로 소통해 왔다. 영어가 국제공용어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으니, 모국어가 다른 두 사람이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가장 큰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것은 영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베트남 사람을 만나서도 영어로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사실은 그 사람에 대한 충분한 존중이 아닐 수 있겠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간단한 베트남어를 배우려는 시도도 하지 않거나 번역기조차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는 그 사람들의 태도는 여전히 여행 중인 국가와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disrespect이 아니느냐 질문했다. 친구는 문화적 자원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물론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상인들에게 당연하게 한국어로 무언가를 요구하고, 상인들을 자신보다 낮은 위치로 보는 듯한 태도와 반말을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친구의 의견에는 십분 동의한다. 내가 가진 문화적 자본에 대한 인지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영어로 소통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고 여행지에 대한 여러 정보를 이미 갖고 있거나 필요하다면 언제든 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들을 갖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가진 자원이다. 이를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문화적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문화적 자본을 적지 않게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양'있는 여행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르디외 Pierre Bourdieu는 자본을 경제적 자본, 사회적 자본, 문화적 자본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화적 자본은 눈에 보이거나 유통되는 자본은 아니지만 사회적 지위와 권력에 중요한 자원이 된다. 사회계급에 따라 문화적 자본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나는 경제 자본이나 사회 자본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자본이 없는 하위층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억압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단언해 온 것이다. 그래서 영어를 하지 않고, 무례하고, 교양 없는 여행객들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말을 통해 생각해보니 나는 내가 가진 문화적 자본을 인지하지 못하고 나와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무시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이를 특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의 교차적인 위치

내가 나의 특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위에서 설명했듯 나의 경제적 자본은 턱없이 부족하고 사회적 자본 역시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문화 자본을 갖고 있고 이 자본을 통해 머지않아 사회 자원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나의 위치는 언제나 낮은 것이 아니며 교차한다는 것이다. 나는 문화적으론 특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의 인종, 성별, 경제적 지위로서는 나는 억압되고 때로는 차별받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를 크랜쇼 Kimberle Crenshaw는 교차성(intersecionality)이라고 정의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고정된 위치에만 놓여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선 특권적인 위치에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억압된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을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냐짱에 혼자 있으면서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공포를 경험하거나 불쾌한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여성으로서 나는 억압된 위치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화자본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특권적인 위치에 있었다. 나의 억압적 위치는 잊는 순간이 없이 생각하면서 나의 특권적 위치는 인식하는 게 쉽지 않다.


문화자본, 교차성 모두 다 석사 과정 내내 내가 공부하는 학문의 기초적인 개념과 전제로서 배워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실제 나의 일상에서는 잊혀있었다. 나의 연구와 삶이 유리된 순간을 경험했다. 내가 연구자로서 가장 경계하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여행은 언제나 질문을 남기고 생각을 바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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