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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쁨의 강물 Jun 12. 2022

#12.내가 어째서 승격 누락이야?(3/3)

[노를 놓쳤을 때와 내려갈 때에만 보인다]


우리의 시야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각자만의 다양한 필터를 가지고 있어서 신기하게도 눈앞에 있다고 해서 모두 다 볼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일상에서도 가방 사고 싶을 때면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가방만 보이고, 차를 바꾸고 싶은 운전자는 차 뒤꽁무니만 눈에 들어온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마음에 목표라는 강한 방향성과 도착점을 가지고 무엇인가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와 같아서 브레이크가 없으며 결승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배를 타고 강 저 편으로 건너가기로 마음을 먹고 노를 젓는다면, 강 주변의 경치를 보면 아름다움을 느껴 볼 여유나 고개를 들어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에 마음을 주지 않는다.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에 ‘노를 젓다가’ 라는 시를 보자.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노를 놓쳐 버린 후에야 비로소 넓은 물이 보이게 된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매번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내 뜻대로 되지 않거나 돌에 걸려 넘어지거나 어떤 방해를 받게 되면, 그제야 숙였던 고개를 들고는 사방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나도 매번 똑같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렇게 ‘그 꽃’ 이라는 시에서 표현한 것은 어떠한가. 정상이라는 목표를 향해 올라갈 때는 내 목표, 내 정상, 내가 해낸다 하면서 나에게만 집중한다. 그리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한다. 내 안의 나와 하고, 시간과도 하고, 체력과도 하고, 또 내 옆을 지나가는 모르는 누군가와도 경쟁을 한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마음이 비어있어서 가볍다. 서두르지도 않고, 걸음을 멈추고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며, 개울물에 발을 적시기도 한다. 시야가 넓어져서 주변을 여유 있게 바라보며 산세를 즐기고, 느지막이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가면 된다며 힘내라고 한 마디씩 건네줄 여유도 있다. 정상에 올라가는 힘든 고비를 넘겼으니 내려오는 길이 우쭐대기 보다는 뿌듯하다. 앞만 보고 달리거나 오르기에 바쁜 사람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다. 주변에 행복을 상징하는 세 잎 클로버가 지천에 널려 있지만 네 잎 클로버라 지칭하는 행운을 찾으려고 행복을 짓밟고 다닌다. 힘을 빼고 살아야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다시 얻을 수 있다. 지나치게 목표만 보고 달리면, 세상의 작은 소중함을 모두 지나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살아가면서 내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죽어라고 달려가는데 갑작스럽게 노를 놓치거나 꼭대기에서 머물지 못하고 어쩔 수없이 내려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감을 멈추게 하는 크고 작은 무엇이 나타난다. 이렇게 삶은 나만속도로 달리는 시간을 멈추게 한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강력한 수단인 노를 빼앗듯이 놓치게 한다. 봉우리에 올라가는 길이라고 열심히 올라갔는데도 어쩔 때는 이정표의 오류로 도리어 한참을 내려오기도 한다.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고, 올라갈 때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들이다.


공기와 물과 같이 너무나 당연해서 존재조차도 시선과 주의를 끌지 못했지만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중한 것들이다. 그래서 내려올 때와 놓친 후에 보이는 것은 연금술사의 눈에만 보이는 현자의 돌처럼 귀해서 눈에 쉽게 띄지는 않는다. 삶은 위대함을 만들고 있다고 착각하는 나를,  멈추게 하고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앞으로 이끌어서 문 너머 저편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나를 멈추게 할 때는 꼭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조용히 어떤 메시지를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커다란 인생 거울을 통해서 알아차리고 배웠으면 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준다. 삶은 나라는 존재를 차원을 뛰어 넘어 사랑하기 때문에 내려오게 하고, 멈추게 하면서 생각과 마음을 어떤 지점에 머물게 한다. 우리는 머물면서 자기 그릇의 몫을 채우고, 어두운 그림자를 끌어안으며 삶을 살피고, 그 지점을 통과하면서 존재의 빛이 더욱 밝아지고 커짐으로 아름다운 지혜를 얻게 된다.


리더십 다면 평가에 어떤 구성원이 ‘사람을 너무 긍정적인 면만 보려고 한다.’라는 코멘트를 써 준 적이 있다. 어떤 의도에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 문장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단적으로 표현해 줬다. 사람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만, 세상을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빛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 그림자 뒤에 숨겨진 빛을 보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순간순간 세상을 점이 아닌 원으로, 원이 아닌 구(球)와 같은 입체와 공간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점점 더 커다란 원과 구를 그려서 그 안에 사랑과 자비심으로 가득 채워서 나의 세상 우주를 넓혀본다면, 무엇보다도 소중한 나의 우주가 누군가에게 찔림을 당하고 공격을 당한다 할지라도 가득 채워진 사랑과 자비심은 나를 보호해준다.

올라갈 때도 내려올 때도 마음의 평정심의 파고가 크지 않은 사람은 자신과 타인 사이의 쿠션이 크고 빵빵하게 채워진 힘이 있는 사람이다. 나와 타인의 경계에 있는 나의 마음의 쿠션의 두께는 어떠한지, 그 쿠션은 무엇으로 채워져서 존재하고 있는지, 무엇으로 채워진 쿠션이 나를 보호하면서 타인 또한 감싸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것이 무엇이든 타인과 나를 연결해주는 맞닿은 나의 일부이며,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탄력 에너지 이며, 타인이 나라는 존재를 느끼는 에너지의 일부이다. 그러니 나의 마음의 쿠션을 더욱 탄성력 있고 두텁게 나다운 것으로 채워보자. 삶이라는 여름 바다를 즐기기 직전의 빵빵하게 채워진 튜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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