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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쁨의 강물 May 08. 2022

#4. 입사 3년 차의 혼란 : 실망과 그림자(2)

[어쩔 수 없었다는 낮은 평가, 그걸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

내가 입사할 즈음에는 삼성 그룹의 남녀 차별 없는 공개 채용이라는 파격적인 시도가 이루어진지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운이 좋았던 때이다. 그래서 같은 사업부에 함께 입사한 동기들도 많았지만 같은 부서에 다른 업무로 8명이나 배치되었고 그중에 여사원은 3명이었다. 너무 좋았다.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할 때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여러 가지로 위로가 되고 분명 힘이 되었다. 얼마 후 매년 크고 작게 조직이 개편되면서 소속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보니, 중소기업을 다니다가 입사한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프로그램 개발하는 친구가 바로 옆 파트에서 일하기도 했다.


어느 날, 박 과장님이 누군가와 ‘할 수 없죠. 어쩔 수 없네요.’라는 분위기로 통화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유선 전화기가 책상 위에 모두 1대씩 있어서 같은 파티션 안에서 통화하는 내용은 어느 정도 화이트 노이즈처럼 공유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평가 면담을 하면서 내가 낮은 고과를 받게 됨을 알게 되었다. 이유는 하위 고과 배분율이 강제 할당되어 있는데, 신입 사원들 중에서는 바로 나란다. 세상에 난 그때까지 나의 그룹장과 말 한마디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를 하위 고과로 지정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기는 하는 거야? 세상에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혼자서만 생각했다. ‘이것은 내가 퇴사하기를 바라는 무언의 압력인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지?’ ‘진짜 자존심 상하고 왕짜증이 난다.’ 머릿속이 말 그대로 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회의실에 들어가서 두세 시간을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나오기를 며칠을 했다. 평가인지라 부끄러워서 동기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혼자서만 끙끙 댔다. 그런데 정작 항의는커녕 평가의 판단 근거가 무엇인지 요청하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다. 너무 순진하게도 진짜 강제 할당해야 해서 운이 나빠서 내가 지목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인사팀이라도 하위 고과를 확정할 때는 반드시 부서장의 동의가 있어야만 한다는 걸 모르고는 박 과장님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바보 멍청이. 자신의 이익이나 권리를 지켜낼 줄도 모르는 헛 똑똑이였다. 그러면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는 것이 평가에 반영됨이 당연하다는 듯 나는 부족한 사람임을 수긍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맡은 업무가 개발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어떻게 일하는 것이 잘하는 건지,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지, 내가 왜 회사에 다니는지 등 아는 답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전공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잘하지 않았을까 라는 막연한 후회와 무슨 일이든 매일 참고 견디기만 하면 되었다. 무슨 일이든 내가 하는 일이 재미가 있으려면 먼저 잘해서 그걸 즐기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수학공식처럼 입력값에 따라 결과 값이 딱딱 떨어지지 않아서 어렵다고 생각했다. 늘 준비하고 계획을 세우며 실천하지만 막상 해보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의 생각대로 삶이라는 세상이 풀리지 않을 때 사람은 그제야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고, 눈을 들어 다른 곳을 보고, 진지하게 돌아보고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지혜를 발견한다.


어쩔 수 없는 하위 평가에서 스스로를 설득하는 방법으로 나름의 레슨 포인트를 찾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마땅히 배우고, 알아차리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 스스로 묻고 또 물으면서 나 스스로 삶을 책임지지 않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나의 삶의 보따리를 하나님 앞에 툭 던져놓았음을, 교만함과 책임을 회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회사가 나에게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 퇴사는 내가 정한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동기들보다 6개월 늦게 주임 진급 면접 심사를 보았다. 당시에는 사원-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 체계였다. 각 부서 그룹장 3-4분이 진급 대상자 3명을 동시에 면접 심사를 했다. 어떤 분이 하위 고과를 왜 받은 거 같은지 나에게 물었다. 진짜 아픈 곳이 어떠한지 또 찔러보는 질문 같았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당당하게 그 일로 인해 한 인간으로서의 개발과 성숙 측면에서 더 겸손해야 하고, 실력을 더 쌓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 대답에 면접 부장님은 입가에 비열한 웃음을 나에게 보였다. 겉으로의 성공과 결과만을 추구해 온 강자의 입장에서 순간의 실패라는 단면 뒤의 깊은 배움 성찰을 하는 일시적인 약자에게 실패는 실패이며, 굳이 그렇게 실패를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며 보내는 비웃음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당당하게 이번의 실패가 더 큰 지혜로 나를 성공과 성장으로 인도하도록 만들겠다고. 문제의 원인은 상황이나 환경 또는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보다 내면에서 먼저 찾아봐야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무엇 덕분에 새롭게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 나의 태도는 성장 상태에 대한 리트머스 지(紙)다. ]

그렇게 일은 점점 익숙해져서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여겨졌다. 성장판이 일찌감치 닫혀버린 아이처럼, 두 눈이 멀어 방아를 돌리는 노예 시절의 삼손처럼, 동그랗게 연결된 기차 레일 위를 쉬지 않고 도는 장난감 토마스 기차처럼 틀에 박힌 일을 반복하는 기계처럼 살았다. 계속 같은 일만 반복해서 처리하고 또 반복했다. 이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는 일을 싫어하고 그런 상황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반복하는 일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거나 스스로 반전 상황을 만들고, 어떤 반전이 일어나야만 살아있음을, 살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었다. 똑같은 길 위에서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고 해도 그 길 위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행동할지의 방식을 결정해야 각자 다른 배움과 성장이 있었을 텐데, 단지 나를 찾아대는 요청하는 전화벨 소리가 책상 위에서 계속 울리는 것이 너무 싫어서 목소리에는 당연하게 짜증은 한가득 배어있었으며,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개발을 돕는 업무였음에도 도리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갑질과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이 무의식적인 습관이 되어 있었다. 급기야 아침에는 5분씩 지각을 하였고 퇴근시간은 정확하게 가방을 싸들고 퇴근을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즐거움과 설렘보다 지루함과 짜증만 가득 쌓여갔다. 일을 통해 뭔가를 배우려는 성실한 노력과 자세보다 어떻게 하면 주어진 상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희망 없는 생계형 직장인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내일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이 그저 오늘의 일터에서도 어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심정만 가득했다. 주인으로 일하기는커녕 나에게 맡겨진 일도 어쩔 수 없이 쳐내야 하는 의무감으로만 지루하고 지겨운 일을 처리했다.

일을 하는 감사를 모르고, 나를 찾아주는 고객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소중함을 몰랐다. 맨 처음 부서 배치받았을 때의 설렘과 기대는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였으며, 경멸하듯 싫어했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생계형 직장인의 하루하루를 바로 내가 몇 년째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고 지치도록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면서 억지로 들어서 걷고 또 뛰지만 여전히 제자리인 삶을 살았다. 배움도 없고 성장도 없이 그저 힘들기만 했던 생활의 반복이다. 일 년 내내 사시사철 한 발짝도 꼼짝달싹할 수 없는 그런 겨울과 같았다. 봄에는 꽃이 피고, 혹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푸름을 자랑하고, 불타는 단풍으로 세상을 오색찬란하게 수놓는 변화를 만끽하는 가을이 맞이하게 되는 성찰의 계절, 겨울이 아니었다.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겨울만 계속되는 겨울 왕국과 같은 시기였다.


겨울. 겨울에는 춥고, 살을 에는 바람이 불고, 어깨를 움츠리게 만든다. 눈이 많이 와서 오도 가도 못하게 발을 묶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눈 덮인 경치를 바라보면 또 참으로 아름답기도 하다. 그 추위를 버텨내는 나무와 꽃과 풀 한 포기가 추위와 시련의 결과물인 하얀 눈을 고스란히 꽃봉오리처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려하진 않아도 엄동설한에 피는 꽃은 아름답다. 버텨낸다는 것은 실패자들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비굴함이 아니다. 겨울의 기간을 그냥 보내기만 하는 나무는 얼어 죽거나 봄에 싹을 틔우지 못하나, 고통을 이겨내며 안으로 꽁꽁 에너지를 모으고 견뎌낸 나무는 자신의 열매와 영화를 과감히 떨궈내고는 내실을 채워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겉으로 보이는 연약함과 달리 속이 튼튼한 나무만이 겨울을 버텨내고, 내면의 힘과 근육이 단련된 사람만이 혹독한 겨울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다. 나목으로 혹한의 시련과 역경을 견뎌내는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그 가늘고 볼품없고 앙상한 가지의 위대함을 알았다. 씨앗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살아내려고 하는 삶과 생명에 대한 나무의 자세는 죽비처럼 나에게 일침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부디 주어진 상황을 참고 견디며 최선의 시도를 끝까지 해 보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말자.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실린 대나무에 대한 글을 보자.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46쪽). 직장 생활을 하는 나 역시 대나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연차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내면이 단단해지면서 세상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내공을 더 쌓아나가는 경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물리적으로 회사에서 머문 시간의 길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내 앞에서 벌어지는 복잡하고 다양한 어떤 일도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더 큰 삶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마땅함이며 경험의 지혜가 풍성해지는 시간이면서  살아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기회임을 기억하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삶 또한 그러하다. 삶에도 계절의 아름다움이 있다. 계절의 아름다움이 있어야만 삶이다. 겨울의 혹독함이 나와 당신의 삶을 아름답게, 새로운 봄을 맞이하도록 준비시켜 준다. 모든 아름다움은 저절로 탄생되지 않는다. 아픔이든 슬픔이든 고독한 시간 속에서 내가 견디고 버텨내며 조금씩 천천히 채워가는 기다림이라는 정성의 크기만큼 아름다움의 꽃으로 피어날 것임을 믿는다.


일상의 삶에서 드러나는 나의 태도는 올바르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리트머스 종이는 기체와 고체에는 반응하지 않고 산성 또는 염기성 액체에만 반응한다. 리트머스 종이는 레몬즙과 같은 산성에서는 붉은색으로, 석회수, 암모니아수와 같은 염기성에서는 푸른색으로 변한다. 이 성질을 이용하여 어떤 수용액이 산성인지, 염기성인지, 중성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리트머스 종이 색 변화로는 정확한 PH(산성이나 염기성 정도를 나타낼 때 쓰는 단위)를 알기는 어렵다.

일상의 삶에서 나는 어느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소금물, 설탕물은 그 맛은 다르지만 중성이므로, 리트머스 종이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의 어떤 행동에, 어떤 감정에, 어떤 모습의 태도로 반응하고 있는가. 누군가 나의 태도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것 또한 나의 태도에 대한 리트머스의 또 다른 반응일 뿐이다. 그러니 못 본 척하지 마라. 영향을 받지도 마라. 그건 단지 나의 어떤 면을 반영하여  보여줄 뿐이다. 용액에 대한 반응으로 변한 색상을 보고 그냥 알고 참고만 하는 것처럼 나의 마음의 태도가 드러나는 행동(현상), 타인의 평판과 같은 반응을 보고 그냥 그렇다는 정보를 알게 된다. 개선할 것인지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는 참고하여 선택하면 된다. 산성이 더 좋다거나 알칼리성이 더 좋다거나 그런 건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나의 태도에 대한 나의 반응과 타인의 반응 중에 어느 것도 좋거나 옳고 나쁘거나 그른 것은 없다. 그냥 그것일 뿐이다. 다만, 내가 거기에 어떤 관점으로 어떤 꼬리표를 붙이느냐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게도 된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자주 나의 태도가 어떠한지 다양한 사람들의 리트머스지에 적셔 보라. 그렇게 미세 조정을 자주 해야만 삶에서 크게 방향을 유(U) 턴 할 일이 적게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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