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 집 꼬마는 인형의 집을 선물로 받았네"
"어머...저 집에 전자레인지 새로 들였나 봐"
우리 가족은 산책을 했을 뿐인데
늘 다니던 길을 함께 지나갔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남의 사생활을 엿보고 말았다.
늘 다니던 길이지만 연말이 되면 영국의 주택가 풍경이 눈길을 끈다. 우선, 대문 앞에 걸린 크리스마스 화환부터 빼놓을 수 없다. 기성 제품을 걸어두기도 하고 솔방울과 나뭇가지, 꽃, 나뭇잎 등으로 직접 만든 작품도 있다. 대문 위 한 뼘 공간도 놓치지 않고 산타클로스나 북극곰, 펭귄 등의 인형으로 채워 놓았다. 집 주변 나무와 담장, 창문, 지붕, 굴뚝까지 각종 조명 기구와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장식품으로 가득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장식용 전구에 불이 들어오면 화려함이 더해진다.
연말에 영국의 주택가를 거닐던 우리 가족의 눈길을 끄는 건 이런 장식품만이 아니다. 어떤 집 아이가 인형의 집을 선물로 받았는지, 또 어느 집에서 가전제품을 새로 바꾸었는지 등 철저히 타인의 사생활에 해당하는 영역마저도 드러날 때가 있다.
이런 제품을 담았던 상자가 버려지기 때문이다. 위 사진 속 아이의 키만큼 큰 상자가 나왔던 적이 있다. 전자제품 상자와 포장도 흔하게 나온다. 그렇다고 우리가 남의 집 쓰레기통을 훔쳐본 건 아니다.
영국에는 단독 주택과 연립 주택이 많다 보니 집의 외관과 거실, 정원, 집 앞에 놓인 물품까지 외부에 노출된다. 쓰레기통도 예외가 아니다. 지자체에서 배포하므로 각 가정마다 대부분 동일한 색상과 형태의 쓰레기통을 쓴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 강풍이라도 불면 빈 쓰레기통이 여럿 넘어져 골목에서 나뒹굴기도 한다. 굵은 펜으로 집 번지수를 쓰거나 번호 스티커를 붙여두지 않으면 자기 집 쓰레기통을 찾아내기 힘들 수도 있다.
12월이 되면 영국은 크리스마스 연휴에 이어 연말 파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는 시기다. 연중 최대 할인 행사도 실시된다. 그러니 누구나 쇼핑을 하고, 누구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고, 누구나 파티를 즐긴다. 온라인으로 쇼핑한 제품을 우편으로 받거나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는다. 집으로 초대한 손님이 챙겨 오는 것도 있다. 배송 포장과 제품 상자, 완충재까지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대형 포장이나 상자는 쓰레기통에 잘 들어가지 않으니 쓰레기통 옆에 쌓아둔다. 꼭꼭 눌러 접거나 칼로 잘라서 부피를 줄이면 재활용 쓰레기통에 쏙 들어가지만, 쓰레기 처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 영국인이 제법 많다. 쓰레기 분리수거 기준 자체가 느슨하고 재활용 범위도 좁다. 비닐과 종이가 섞인 포장지나 상자도 별도로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일반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도 있다.
연말에 집중 소비가 이루어지고 그 흔적들을 가는 곳마다 발견하다 보면 타인에 비해 초라한 자신의 소비 행태에 누군가는 아쉬움을 가질 수도 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이런 면에서는 의연한 편이다.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꼭 할인 기간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건 필요할 때 사자"라고 가족들에게 말한다. 오히려 누군가의 집 앞에 버려진 크리스마스 선물의 흔적을 보며 미소 짓는 일이 종종 있다. 산타클로스에 대한 아들의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우리 부부가 007 작전을 펼치던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나이가 된 아들에게 "너도 바비 인형 세트 사줄까?", "벤텐 시계 갖고 싶니?"라며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집과의 쓰레기통 비교에서 우리 가족도 완벽하게 의연해지지 못할 때가 있다.
바로 유리 쓰레기 때문이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영국의 유리 쓰레기통은 대체로 덮개가 없는 상자 형태라 누구나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잼이나 양념, 음료수 병, 술병 등이 골고루 자리를 차지하지만 연말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상자 가득 술병이 담겨 나온다. 보기에도 위태로울 정도로 상자 위까지 탑처럼 쌓아둔 집도 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기념하는 파티를 벌이면서 다들 먹고 마시니 술병이 잔뜩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집은 술 소비량이 극도로 적은 편이다. 우선 내가 술을 못하고, 나 보다는 잘 마시는 편인 남편조차 마시는 빈도가 줄었다. 집에서 같이 마실 사람이 없으니 술 마시는 재미가 없으리라. 지인을 초대해서 파티라도 벌이면 술 소비량이 급격히 늘지만 요즘은 그런 기회마저도 코로나로 인해 박탈당했다.
우리 집 사정이 그렇다 뿐이지, 전염병이 창궐한다고 영국인이 술을 마시지 않는 건 아니다. 특히 영국 전역에 봉쇄령이 내려져 모임 자체가 금지되었던 작년 연말과 달리, 올해는 모임이 완전 금지된 건 아니니 여전히 파티를 벌이고 술을 마시며 그 결과로 술병 쓰레기가 한가득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술 소비량이 바닥을 치는 올해 우리 집 유리 쓰레기통 사정은?
이렇다.
평소보다 많은 편이다. 언뜻 보면 술병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나도 처음 영국에 왔을 때는 술로 오해했지만, 여기에 담긴 건 대부분 같은 브랜드의 주스 병이다. 마트에서도 구매 가능하지만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술 마시는 이들과 어울리기에 어색하지 않은 디자인이지만 어쨌건 음료다.
만 16세 아들을 포함해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세 명이나 있는 집에서 연말에 주스 병이나 잔뜩 내놓다니... 연말만 되면 우리 집 쓰레기통을 감추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