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옆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몇 해 전 크리스마스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전날 밤 TV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늦게까지 본 후 피곤해 쓰러지듯 잠든 우리 부부는 공휴일이라 맘 놓고 오전 늦게까지 누워 있었다.
평소에도 어른보다 먼저 잠에서 깨는 아들이 이날만큼은 부모의 늦은 기상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곁에 와서 뭐라고 말을 건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카드는 이미 안겨주었으니 그에 대해 언급하는 건 아닐 테고. 방학을 맞이하여 신나는 놀이거리라도 생겼나?
들뜬 목소리로 조잘대던 아들이 무언가를 손으로 펄럭이며 나더러 읽어보라고 한다. 아들의 재촉에도 쉽사리 잠이 달아나지 않아 눈꺼풀이 다시 감기는 판에 읽을거리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우리가 깰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굳건한 자세로 곁을 떠나지 않는 아들의 위력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바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눈앞에 펼쳐진 희끄무레한 물체를 정신없이 들여다봤다.
이 무슨 황당한 내용인가. 한국어 표현이 서툰 초등학생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법이란다.
크리스마스에는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는 소리다. 자기 혼자 일방적으로 발의해놓고 오전에 법안 심사를 했더니 어른들이 늦잠으로 불참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통과시켰다고 한다. 우리 집 법이니 무조건 따라야 한단다. 한국어도 서툴고 나이도 어린 초등학생의 입에서 법안 발의니, 심사니 이런 말이 술술 나왔을 리 없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법안 통과 절차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영어와 한글로 섞어가며 아들이 설명한 걸 이렇게 옮겨보았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 12월, 영국의 고속도로는 물론 공항 활주로마저 얼어붙어 비행기 이착륙이 중단되고 사고 소식도 끊이지 않았다. 기록적인 한파와 폭설로, 영불해협을 통과하는 열차인 유로스타에까지 문제가 발생했다. 그 바람에 비행기 대신 기차를 이용하려고 한꺼번에 몰렸던 여행객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크리스마스 휴가 대란을 전하는 뉴스가 이어지자, 역시 집 밖은 위험하다,라고 인지했던 아들은, '크리스마스 날, 밥 먹고 산책이나 하자'는 엄마의 제안에 불안감을 느껴 법안 발의를 결심했다고 한다. 아이의 장난으로 받아치려 했던 법이 지금껏 우리 가족의 발목을 잡고 있다.
기상 이변으로 인한 교통 대란이 아니더라도,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면 아들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
연말이 되면 회사 동료와 친구, 연인, 가족과 모임을 가지거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선물 마련을 위해 쇼핑에 나서는 모습은 한국과 다르지 않다. 시내 중심가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화려한 장식을 뽐내는 거리와 건물들 사이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를 더한다. 12월 26일은 연중 최대 할인율을 자랑하는 복싱 데이 세일이 펼쳐진다. 이를 놓치지 않으려 새벽부터 줄을 서서 상점에 들어서는 쇼핑객들로 주변 일대가 마비될 정도다.
하지만, 12월 25일 하루만큼은 전혀 다른 풍경이다.
첫째 줄 왼쪽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1. 골든 쥬빌리 브리지 (Golden Jubilee Bridge)
2. 옥스퍼드 광장 (Oxford Circus) 지하철역
3. 옥스퍼드 스트리트 (Oxford Street) 쇼핑가
4. 배터시 브리지 (Battersea Bridge)
5. 버킹엄 궁전 (Buckingham Palace)
런던의 주요 명소를 담은 사진이다. 관광이나 쇼핑,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로 연중 내내 붐비는 런던에서도 가장 혼잡한 거리에 해당한다. 엄밀히 말해 영국에서 가장 혼잡한 거리다. 쇼핑의 거리로 유명한 옥스퍼드 스트리트는 유럽의 쇼핑가 중에서도 가장 혼잡하다.
그토록 많은 이들로 붐비는 런던이라도, 일 년에 단 하루 이런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참고로, 코로나와 무관한 2016, 2019년도 사진이다.
크리스마스 당일, 대부분의 대중교통이 운행을 중단하고 박물관과 공연장, 전시장이 문을 닫는다. 사람의 발길이 끊기니 식당과 카페도 대부분 영업하지 않고, 대형 마트도 문을 열지 않는다.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겠다고 혹은 쇼핑을 하겠다고 시내에 나갔다가는, 돌아다닐 교통편도 없고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실 곳도 찾기 힘들다.
한국 대형 마트의 격주 휴무처럼, 영국 (잉글랜드, 웨일스)에서도 일정 규모 이상의 상점은 반드시 휴무해야 하는 날이 있다. 바로, 부활절 일요일과 크리스마스 당일이다. 쇼핑객이 가장 많이 붐빌만한 시기에 영국의 상점이 문을 닫으니, 이를 모르고 거리로 나갔다가 당황하는 외국인이 더러 있다.
한국의 설이나 추석처럼 영국에도 그리운 가족과 친지를 만나기 위해 집중적으로 귀향길에 오르는 시기가 있다. 앞서 언급한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휴가가 이에 해당한다. 귀향 대신 지인을 집에 초대해 파티를 벌이기도 하고 종교 행사에도 참여한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외출을 자제한다는 점이다.
영국에 살면서 귀향도 힘들고 추운 날씨에 돌아다니는 것도 불편하게 여기는 우리 가족을 위해 내가 12월이 되면 챙기는 것이 있다. 상점 영업시간표와 TV 방송 시간표가 그것이다. 크리스마스 당일 상점 문을 닫고, 그 전후 일정마저 단축 영업을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손님 초대는커녕 당장 가족들의 저녁거리도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S&B Vonlanthen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