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바로 이맘때, 아들의 학교를 방문했을 때다.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학교 앞마당에 빼곡히 모여 차례를 기다리는데, 난데없이 놀란 짐승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나도 잠깐 헷갈리긴 했지만, 이걸 짐승의 소리로 표현한 건 내 남편이 먼저다.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학교에서, 그것도 방학으로 텅텅 비어있던 건물에서 짐승의 소리라니.
지금껏 매년 이 시기에 영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TV 화면으로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10대 청소년들의 열광하는 모습까지 학창 시절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나조차 엉뚱하게 짐작했을지 모른다.
아들의 졸업시험 성적표를 받으러 간 날이다.
졸업반 학생은 6월에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학교를 졸업하는 셈이니, 두어 달이나 보지 못하던 친구들과 재회한 아들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우리 부부 또한 생소한 문화 체험의 현장을 접하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짐승의 외침을 연상케 하는 소리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쯤 되니, 나는 더 이상 불쌍한 짐승들이 어디선가 날벼락을 맞는가 우려하던 모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학생들끼리 어울려 성적표를 공개하며 자축하는 분위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시험 성적을 등수로 구분하여 공개하는 문화는 아니지만, 시험에 대한 부담이 덜한 영국의 학생들은 평소에도 이렇게 자신의 성적표를 자연스레 보여준다고 한다.
영국의 중등학생이 치르는 졸업시험인 GCSE는 과목별로 1에서 9등급까지의 성적 중 4등급 이상 되어야 합격이다. 이 성적을 바탕으로 상급 학교인 대학준비반에 입학하고 2년 뒤 대학에 지원할 때 일부 성적이 반영되기도 한다.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입시 시대에 학생 모두가 최고 성적을 거둘 수는 없다.
누구는 수학에서 6등급을 받고, 누구는 영어에서 9등급을 받는 등 각기 다양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서로를 축하해 주고 환호성을 질렀다. 6주 동안 진행된 길고 지루한 시험을 통과하고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함께 기뻐하기에 충분하리라.
학생은, 종이 성적표를 학교에서 직접 수령하는 방법과 집으로 배송받는 방법, 온라인으로 성적을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하기에 우편이나 온라인으로 받아도 되지만, 꼭 학교에 가서 받겠노라 선언한 아들 때문에 어른 두 사람까지 이렇게 따라나서기로 했다.
이날 현장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학교로 파견된 지역 신문사 기자가 학생에게 한 질문이다.
성적표가 배포되는 드라마실 강당 입구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학생들 옆으로 카메라를 들고 서있던 사람이다.
언뜻 보면 이날 모인 교사나 학부모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차림이었지만, 성적표를 받은 학생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연히 이 자리에 있던 내 아들과 아들 친구까지 인터뷰를 하고 사진이 신문에 실리는 바람에 나도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이날 기사에 실린 학생들은 이름과 학교, 성적, 향후 전공과목, 미래 포부까지 공개되었다. 미성년자를 취재하면서 바로 옆에 있는 부모의 동의도 안 받고 사진과 기사를 싣다니 놀라웠다. 미성년자의 초상권을 엄격히 따지는 영국에서 말이다. 아무에게나 인터뷰에 응하고 사진을 싣게 하면 어떡하냐고 내가 아들에게 따지기까지 했다.
다행히 학교에서 허락하는 취재 수준인 듯하여 넘어가긴 했는데, 이날 실린 다양한 성적과 포부를 지닌 학생들의 기사를 보며 한층 더 놀라고 말았다.
앞에 서있던 한 남성이 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물었다. 아들은 긍정의 의미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고개도 끄덕였다.
셔츠와 반바지 차림이라 같은 학부모인 줄 알았던 이 남성은 아들 학교의 과학 선생님이란다. 아들의 담임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판에 일반 교과목 선생님은 더욱 모르지. 그나마 학기 중이라면 교사 특유의 정장 차림만 보고도 알아차리지만 지금은 방학이지 않은가. 교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사들이 집에 있다가 그대로 나온 듯 편안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교장, 교감에 이어 졸업반을 지도했던 교사들까지 이 자리에 모여 학생들의 결과를 함께 지켜보며 축하해주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여성이 다가오더니 아들에게 칭찬의 말을 쏟아냈다. 우리 부부에게도 눈인사를 하기에 우리도 웃으며 반겼다. 그런데,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아들도 아무런 소개를 해주지 않았다. 이 상황에 누구냐 질문하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시험 성적표를 받으러 온 같은 반 학생이겠거니 짐작만 했다.
나중에 아들에게 물어보니 종교 과목 선생님이란다. 아들의 우수한 수업 태도와 성적을 칭찬하며 나에게 학기마다 이메일을 보내던 분인데 한 번도 직접 뵌 적 없어서 얼굴은 몰랐다. 이 자리에서는 교사인지도 몰랐다.
이날 우리 가족에게 다가와 처음으로 알은체를 한 셈인데 우리는 서먹하게 대하고 말았다. 영국의 10대 여학생은 머리도 기르고 화장까지 하기에 성인 여성과 구별하기 힘들 때가 있다. 이 선생님도 그런 여학생 중 한 명이라 착각했다.
이날 한 학부형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이번에 딸은 A레벨을, 아들은 GCSE를 쳤어요. 그래서 지난주에는 딸 학교에 가고, 오늘은 아들 학교로 시험 결과를 보러 왔지요."
두 살 터울의 남매를 키우는 가정인데, 수험생이 두 명이나 한 집에 있었던 것이다. A레벨은 대학준비반의 졸업시험으로 대학 입시에 성적이 직접 반영되므로, 한국의 수능과 같은 역할을 한다.
대학준비반의 시험성적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졸업시험인 A레벨 성적표를 받고 기뻐하는 학생들이다.
학교에 마련된 기념 공간에서 학생들이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 있다. 대학준비반 학생은 이미 대학에 지원한 상태인데, 이날 받은 성적이 최종적으로 당락을 결정하게 된다.
대학을 최대 세 곳까지 지원할 수 있기에 1 지망으로 선택한 학교에 불합격하더라도 차선책으로 다른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학생은 졸업시험 기간 못지않게 학교 선택이나 입학 준비로 바쁜 시기를 보내야 한다. 1 지망에 떨어지고 다른 학교를 알아보느라 혹은 집에서 떨어진 타 도시 대학으로 가기 위해 생애 처음 집을 떠나는 채비를 하느라.
바로 어제인 8월 21일... 3년 전 내 아들이 기다렸던 것처럼 올해의 GCSE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또한, 그 보다 일주일 전인 14일에는 A레벨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위 사진의 현수막 글귀처럼 모두에게 행운을 빌어본다.
Best wishes.
커버 이미지: sunderlandecho.com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