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깜짝 선물이야. 그동안 거미 때문에 힘들었지?

나도 힘들었어

by 정숙진

"대왕 거미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 문을 열려했더니, 문 밖에 서있던 남편이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욕실 입구에서 어슬렁거리던 거미 한 마리가 나의 갑작스러운 출연에 놀랐는지 쪼르르 공부방 쪽으로 도망갔다. 남편이 쫓아갔지만, 거미 생포에 그다지 의욕이 없어 보이는 남편은 이를 놓치고 말았다.


지금껏 우리 집에 나타난 그 어떤 곤충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다란 거미였다. 두 부부가 합세해 방 곳곳을 뒤졌더니 하필 내 가방 밑에 잠복해 있는 걸 목격했다. 그 바람에 더 놀란 나는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토록 무섭고 꺼림칙한 존재는 알아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편안한 숙면을 위해서라도 거미 씨를 안전하게 붙들어 집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이런 때는 우리 가족 중 제일 용감한 아들을 부르면 좋으련만, 취침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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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아들은 이렇게 용감했다.


부엌 바닥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보고 소리 질렀더니, 아들이 달려와 이를 종이 위에 올린 뒤 밖으로 보냈다. 아마도 민달팽이가 아닐까 싶다.


그 시간에 잠든 아들을 깨울 수는 없으니, 불쌍한 남편에게 부탁했다.


부탁이라고 말로 꺼낼 필요도 없었다. 내가 더 겁이 많다는 사실을 남편도 알기에. 이미 한밤중인데도 한 차례 비명을 질렀으니 조용한 동네 분위기를 신경 써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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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방식으로 그 무시무시한 대왕 거미를 잡아다 정원에 놓아준 남편을 칭찬해 줬다.



거미공포증 (Arachnophobia)이라고 들어본 적 있는가?


바퀴벌레만큼의 위력은 아니지만 결코 아름답다 할 수 없는 색깔과 용모, 그리고 몸뚱이에 비해 지나치게 긴 다리, 그것도 8개나 달린 것이 재빨리 움직이는 모양새까지, 이런 생명체를 맞닥뜨리고도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지구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간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지만, 흉측한 생김새 때문에 미움을 받는 억울한 거미다.


그런데, 단순히 혐오스러운 모양새나 독성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에 거미를 무서워하는 정도를 벗어나 병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영국에서는 ‘거미공포증’을 치료받아야 하는 병으로 여긴다.


고소공포증, 폐소공포증, 대인공포증 등 공포증이 동반하는 흔한 증세로는 현기증, 메스꺼움, 식은땀, 심박수 증가, 호흡곤란, 신체 떨림, 소화불량 등이 있다.


- NHS 웹사이트



거미 앞에서도 이런 공포증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있기에 질병으로 분류한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 서면 현기증을 느끼거나 곤충이 눈앞에 나타나면 심장이 콩콩 뛰는 현상은 나도 겪지만, 그 외 다른 증세는 없다. 그래서, 병적인 공포증은 나와 무관하다 (라고 스스로 진단해 본다).


병적인 거미공포증이 치료받을 수 있는 질병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런 질병을 앓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친구가 거미공포증 치료를 받았다고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과 글을 보면서부터다.


커다란 털북숭이 타란튤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하게 웃는 친구의 사진을 보고 처음에는 기겁했는데, 사정을 듣고 보니 수긍이 갔다. 이 친구의 글과 사진 밑으로 남겨진 수많은 축하 메시지와 경험담까지 읽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 질병을 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많은 메시지 중 특히 한 여성의 경험담이 기억에 남는다.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라서 자세히 물어볼 수는 없기에, 단 두 줄로 남겨진 글을 바탕으로 이 여성의 황당한 일화를 재구성해봤다.



오늘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다.


매년 기념일마다 남편이 이벤트를 준비하는데, 올해는 뭘 준비했는지 물어봐도 '가보면 안다'고만 되풀이할 뿐이다. 보나 마나 작년처럼 뮤지컬을 관람하고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겠지.


매번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패턴임에도 남편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행동한다. 이벤트 아이디어와 식당을 고르는 그의 안목만큼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기에 조용히 따라주기로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미지의 장소로 향했다. 30여 분가량 런던 시내 방향으로 달리니 멀리 템스 강이 보이고 건너편에 테이트 미술관도 눈에 띄었다. 곧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이어 버킹엄 궁전도 나타났다.


그렇다면...

지난주부터 시작한 BBC 프롬스를 관람하러 가는 걸까?


아니다...

거기는 로열 앨버트 홀인데 그쪽으로 가려면 진작 서쪽 도로를 타고 하이드 파크 방향으로 갔어야지. 우리 차는 계속 북쪽으로 향할 뿐이다.


북쪽이라면, 설마...

마담 투소 박물관에 가려고?


새로 들어온 브래드 피트 밀랍인형을 보러 가자고 내가 조르긴 했다만, 하필 결혼기념일에 그토록 아이들로 붐비는 장소로 가려고?


아니다...

차는 계속 달린다. 다행이다.


어...

그런데...

왜...

남편이 동물원 입구에다 차를 세우지? 주변에 공연장은커녕 식당이라 할만한 곳은 입구 매점 밖에 없는데.


더욱 황당하게도, 다정하게 차문을 열어주던 남편은 내가 내리자마자 곧바로 다시 운전석으로 올라타더니 '치료 잘 받고 와'라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치료라니?' 내가 질문을 내뱉기도 전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녹색 유니폼을 입은 동물원 직원이 내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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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SL London Zoo



위 이야기 속 여성이 얼떨결에 찾은 곳은 동물원에서 운영하는 거미공포증 치료 클리닉이다. 물론, 사진에서처럼 처음부터 거미를 들고 나타나 치료 고객을 맞지는 않겠지만.



영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정원 딸린 주택은 아파트에 비해 자연과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 정원에 심어둔 나무와 화초, 잔디, 텃밭의 채소는 말할 것도 없고, 몇 개월간 음식물 쓰레기를 쌓아서 만드는 퇴비, 빗물을 받아두는 물통까지 벌레들이 좋아하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 많은 생명체들이 정원에서만 지내면 좋으련만, 열어둔 창문이나 문틈을 통해 집 내부까지 들어온다. 거미와 나방이 특히 흔하다. 비 오는 날, 날개가 젖은 벌이 들어와 쉬어 가기도 한다.


민달팽이는 요술쟁이 같다. 잠들기 전 집안의 문이란 문은 모조리 꼭꼭 닫아두었음에도, 어디를 통해 들어오는지 꼭 한 두 마리씩 밤마다 실내로 들어와 바닥을 기어 다니며 나를 기겁하게 만든다.


어두운 밤에 길을 잘못 든 새가 우리 집 욕실로 날아들어온 적도 있다. 처음에는 초대형 나방인가 했더니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날개를 파드닥거리는 모양새를 보고 로빈새임을 알아차렸다. 한낮의 평화를 즐길 때는 그토록 아름답고 앙증맞던 새가, 한밤중 무단침입한 상태에서는 공포 영화에 출연하는 괴물로 다가오다니.


주택가에 버려진 음식물을 먹고사는 짐승도 있다.


창가에 서서 어두워진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두 눈이 자동차 불빛에 하얗게 반사된 여우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낙엽 위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고슴도치도 만났다.


개구리와 두꺼비의 차이를 파악하는 계기도 되었다. 단순히 생김새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개구리는 연못 등 물가 근처에 살지만, 두꺼비는 산이나 초원에서 사는데 그래서 간혹 주택가에도 나타난다.


방심하면 비명 지를 일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공포증 환자가 아니라고!

알겠나, 남편과 아들?


커버 이미지: clipart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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