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 펠리컨... 헷갈리는 영국의 도로

by 정숙진

"영국의 도로는 너무 날씬한 것 같아요."


자신의 능숙한 운전 솜씨만 믿고 운전대를 잡았다가 당황한 A의 말이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차를 끌고 나갔건만 차선 하나를 꽉 채울 정도라고 했다. 안 그래도 한국과 운전 방향이 달라 적응하기 힘든 판에, 도로마저 좁아서 영국에서 첫 운전대를 잡은 날 진땀을 뺀 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모든 도로가 좁다고 할 수는 없지만, A가 주로 다닌 관광지는 영국의 도로교통법이 정한 도로 폭 기준을 충족하기 어려운 곳이 제법 있다. 21세기 도로 규정에 안 맞다고 혹은 운전자에게 불편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로마시대에 지어진 도로와 건축물을 파헤치고 확장 공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닐 수밖에.



"도로 한복판에서 차들이 뱅글뱅글 돌다가 제각각 딴 방향으로 빠져나가는데 너무 헷갈려요."


B도 영국에서 운전을 갓 시작한 사람이다.


그가 지적한 도로는 영국에서 라운드어바웃 (Roundabout)이라 부르는 곳이다. 한국식 회전교차로에 해당하는데, 운전 방향도 다르고 물리적인 신호가 없는 상태에서 여러 대의 차가 동시 진입하는 교차로 운영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roundabout.jpg kccmediahub.net



이처럼 생소한 구조나 불편한 도로 사정 등 영국에서 처음 운전하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요소가 더러 있다.


신호등이 없음에도 차량이 반드시 멈추어야 하는 도로가 있는가 하면, 횡단보도이면서 어디까지가 보행 구역이고 어디까지가 자동차 정지선인지 헷갈리는 곳도 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로부터 살펴보자.



Beatles.jpg Apple Records



바로, 비틀스의 음반 사진에 나오는 도로이다.


내가 영국에 오기 전 이 사진을 봤을 때만 해도 4명의 걸음걸이와 옷차림만 눈에 들어오더니, 영국에 와서는 이들이 건너는 도로 위 바닥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쓸 무렵에는 폴 매카트니의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또 뭐가 눈에 들어올까, 하며 또 한 차례 사진 구석구석을 파헤치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붙들어 매고, 이제는 도로에만 집중해 보기로 한다.


이 도로는 런던에 있는 애비 로드 (Abbey Road)로, 비틀스의 음반 제목이기도 하다. 이들이 음반을 작업한 스튜디오 이름도 애비 로드 스튜디오로 길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비틀스의 유명세 덕택에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도로인데, 엄밀히 따지면, 도로라기보다는 도로에 위치한 횡단보도이다. 인터넷에서 'The most famous Zebra crossing on earth'라 검색하면 위 사진이 뜬다. 말 그대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횡단보도’이며, 이 지점에서 보행자들이 비틀스 흉내를 내며 길을 건너는 모습도 함께 뜬다.



Abbey road.jpg Getty Images


그럼, Zebra crossing이란 무엇일까?



얼룩말 횡단보도 -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 Zebra crossing


Zebra crossing.jpg thesun.co.uk



반세기 전, 비틀스가 음반 사진을 찍었던 횡단보도와 같은 형태다.


Zebra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얼룩말의 줄무늬를 연상시키는 흰색과 검은색이 대비를 이룬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건널목 형태다. 한국과 차이점이 있다면, 신호등 대신 건널목 양쪽 끝에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위로 노란색 등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먼 거리에서도 또 한밤중에도 노란 등의 존재가 드러나기에, 이곳에서 보행자를 발견하면 차량은 반드시 멈추어야 한다. 학교와 병원 근처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이곳을 다니는 보행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외에도 영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횡단보도가 있는데, '얼룩말 횡단보도'처럼 대부분 동물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보행자의 안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횡단보도에 왜 이토록 우스꽝스럽게 동물 이름을 붙였는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아이에게 도로 안전 수칙을 가르칠 때는 상당히 도움이 된다.


"어, 저기 얼룩말 있네, 얼룩말. 우리 저기까지 가서 길 건너자!"



다른 동물 이름도 살펴보자.



펠리컨 횡단보도 - 버튼을 눌러 신호를 기다리는 횡단보도

* Pelican crossing


Pelican_Crossing.jpg SABRE Wiki


영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횡단보도이다.


Pelican crossing은 예전 명칭인 'Pelicon' (PEdestrian LIght CONtrolled)에서 왔다. 이 또한 동물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명칭을 변경하였으리라. 보행자가 신호등에 부착된 버튼을 직접 누른 후 건너는 형태다.


이 횡단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버튼을 눌러야 신호등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몰라 한없이 도로 건너편을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운전자가 되어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건널목이고, 정지선은 어디까지인지 헷갈린 경험도 있다. 바닥에 그어진 선이 희미해진 도로도 있어서 더욱 분간이 안 되기도 했다.



퍼핀 횡단보도 - 보행 약자를 위한 횡단보도

* Puffin crossing


Puffin이라는 단어는 Pedestrian User-Friendly INtelligent의 약자를 변형한 것이다. 외관상으로는 앞서 나온 펠리컨 횡단보도와 거의 유사하지만,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보행자의 편의를 더 고려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휠체어 이용자처럼 일반 보행자와는 손 높이가 다른 이를 위해 신호등 버튼을 낮게 설치했다. 또한, 시각 장애인을 위한 신호음이 나오기도 하고 보행 속도가 느린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해 보행 신호를 더 늘인다. 반대로, 건너는 사람이 없는 경우 보행 신호를 단축하여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기능까지 있다.



큰 부리새 횡단보도 - 자전거와 보행자가 함께 건너는 횡단보도

* Toucan crossing


Press-button-road-crossing-being-used-by-pedestrian-1536x1024.jpg dayinsure.com



한국어로는 생소한 새의 이름인데 횡단보도 자체는 새의 생김새와는 상관이 없고, 영어 단어의 머릿글자를 조합하여 만든 단어도 아니다.


Toucan crossing = Two + Can + Crossing


둘이 같이 건널 수 있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즉, 자전거와 보행자가 함께 지나가는 횡단보도라는 뜻으로, 이 또한 동물 이름을 넣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인다.


작동법은 앞서 나온 펠리컨 횡단보도의 신호등과 동일하다. 다만, 신호등에 자전거 이미지가 추가되고 건널목 폭도 더 넓다.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는 사람과 보행자 모두 불편함 없이 지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 덕택이다.



아직도 동물 이름은 계속된다.



페가수스 횡단보도 - 말과 보행자가 함께 건너는 횡단보도

* Pegasus crossing


pegasus-crossing-sign-1280x720px.jpg evanshalshaw.com



이제 하다 하다 말이 지나가는 횡단보도가 다 있다니.


앞서 나온 큰 부리새 횡단보도처럼 신호등의 버튼을 눌러 작동하는 방식도 동일하고 건널목 폭도 넓다. 대신, 신호등 이미지에 말이 나온다는 차이점이 있으며, 말을 탄 상태에서도 손이 닿을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추가로 버튼이 하나 더 위치해 있다는 점도 다르다.


아쉽게도, 지금껏 소개된 횡단보도 중 영국에서 가장 보기 드문 형태다.


영국에서 20년 가까이 살며 여행도 자주 다녔지만 말 이미지가 들어간 신호등은 지금껏 단 한 차례밖에 보지 못했다. 영국 어디에서든 거리에 말이 나타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이들을 위한 횡단보도를 별도로 설치해야 할 정도는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더군다나, 보행자 천국인 영국에서는 횡단보도가 없어도, 또 신호등이 없어도 언제든 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기에 더욱 필요성이 떨어진다.


개인적으로는 페가수스라는 이름도 아쉽다. 이왕 동물 이름으로 지으려 했으면 신화 속 캐릭터보다는 현실 속 동물인 말이 들어가야 하지 않나? Horse crossing으로 말이다.


우리 집 근처에 이런 신호등이 있었다면, 페가수스라는 부르기 힘든 이름보다는 내가 지은 말 신호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을지 모른다.



"어, 저기 말 신호등 있네, 말. 우리 저기까지 가서 길 건너자!"


근사한 차림의 기마병이라도 지나가지 않나 싶어 아들과 함께 신호등 옆에서 한참을 기다렸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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