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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디 Jan 03. 2022

런던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내기 3

디자인 수업 따라가기

9월 꽤나 쌀쌀한 런던에 도착한 나는 학교에서 히드로 공항으로 보내준 택시를 타고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처음 보는 영국의 풍경인 고속도로와 국도를 오가는 차들을 보며 '여긴 외제차가 엄청 많네'라 했다가 '여기가 그 '외국'이잖아' 라며 혼자 피식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약 한 시간 정도를 달려서 도착한 기숙사 방은 코딱지만 하지만 샤워부스와 화장실이 모두 있는 나름 엔 스위트(Ensuit) 방이었다. 이 작은 방에 내가 이백만원에 가까운 방세를 낸다는 것에 기가 차면서도 꿈에 그리던 영국, 런던에 왔다는 것에 설레서 얼른 학기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나의 디자인 수업은 녹록지 않았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밑줄 긋고 달달 외워서 전교 1등을 해서 좋은 학교에 가고, 교수님 취향에 맞춰 디자인 작업을 만들어내고 칼같이 졸업을 한 나에게 영국 석사 교육 시스템은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학사가 아닌 석사 과정이라 조금 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교과 과정 전반이 모두 나에게 달렸다. 


'내'가 찾아서 주제를 정해야 하고 '내'가 이유를 이해하고 풀어내야 하고 '내'가 스스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본 이후에 어느 것이 가장 적절한지 '내'가 골라야만 했다. 실제로 센마틴의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과정은 보통 1년인 영국 석사와 달리 2년 과정인데 이중 3분의 1 이상의 시간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실험해보는 시간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첫 학기의 첫 유닛의 타이틀은 ‘Investigate’이었다. 말 그대로 ‘조사하다’, 이게 끝이다. 센마틴 학교 주변의 어떤 것이든 골라 각자의 방법으로 ‘조사’를 하고 그 각자의 결과물을 가져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어떤 숨은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한 건가? 말로는 제한이 없다고 하지만 동양인인 나는 모르는 디자인 필드 내 존재하는 그런 적당한 기대치와 기준이 있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느라 일주일을 다 보냈다.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아무 감도 잡히지 않았던 첫 피드백 시간, 모두들 뭔가를 가져오긴 했다. 대부분 완성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부족해 보이는 연필 스케치나 심지어 찢어진 노트에 대충 몇 글자 적어온 친구도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갈수록 감이 안 잡힐 때 즈음 그 친구의 발표 차례가 왔다. 그런데 친구는 그 몇 글자로 15분을 혼자 이야기했다. 왜 자신은 해당 오브젝트에 매료되었는지, 어떠한 조사방법들을 썼는지, 어떤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 이것으로 어떠한 작업을 하고 싶은지, 지금이야 이해가 되지만 그때는 정말 이건 눈앞에서 입만 산 사기꾼을 보는 느낌이었다. 반면, 나는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오브젝트에 대한 배경과 왜 이것이 중요한 지에 대해 버벅거리는 영어로 약 2분간 말할 수 있었다.


그 유닛이 끝날 때 그 친구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고른 오브젝트에 개인적인 성향을 듬뿍 넣은 과정과 아이디어 덕에 매우 그 친구스러운 작업이 나왔고, 나는 폰트와 레이아웃 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 깔끔하지만 흔한 작업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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