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서 작성은 성별정정툴킷을 참고하세요
*이 글은 당사자(신청인겸사건본인)와의 합의 하에, 당사자의 검토 후 게시되었습니다*
성별정정 절차는 대강 신청서 작성(여기서 수많은 서류를 떼서 첨부하게 된다) → 제출 → 심문기일 지정 → 심문기일 출석 → 결정(인용/기각) → (인용의 경우) 관공서 가서 이것저것 바꾸기 / (기각의 경우) 항고하거나 취하하고 다른 법원으로... 순으로 진행한다. 신청서 작성 편이 없는 이유는? 성별정정툴킷 같은 곳에 들어가면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뭘 하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해놨는데…; 그런데 오늘 심문기일 다녀오니 또 할 게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갓반인 친구(그렇다 나에게도 변호사도 퀴어도 활동가도 아닌 친구가 있었다)가 "우리나라에서 성별을 바꿀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정말로 몰라서 물어본 듯. 가장 처음으로 성별이 정정된 케이스는 천안지원 90호파71 결정이라는데, 나도 그 결정문은 본 적 없다(찾으면 더 오래된 것도 나올 수 있겠지만 들은 건 없다. 애초에 하급심 판결/결정을 찾는 것이 그리 쉽나). 성별에 관한 호적정정이 가능하다고 판시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문은 2006스42. 그리고 그 이후로 수많은 결정들.
나의 개업 후 첫 성별정정 의뢰인은 호르몬치료 기간이 짧고 궁적을 하지 않은 FTM 의뢰인이다. 다른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나이가 어리다. 살아온 시간이 짧기 때문에 호르몬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기간이 짧고, 궁적을 받을 만한 돈을 모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호르몬을 오래 맞지 않았지만 확실히 FTM이 맞으니 사회질서를 어지럽힐 우려가 없고(?), 궁적을 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건강상으로도 문제가 많으므로 궁적 없이 성별정정을 허가해달라는 내용으로 판사를 설득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의뢰인은 성장환경진술서와 수술미완사유서를 쓰고 인우보증서를 받아오고, 나는 신청서를 썼다. 초안 쓰는 데 한 달은 걸린 것 같다. 어느 정도 자세히 써줘야 서로 할 말이 있거든. 어렸을 때 에피소드를 뽑아내느라고 서로 오만가지 이야기를 다 했다. 님은 그런 일 없었어요? 아니 교복을 안 입어? 어? 띠용? ... 보증인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네 이렇게 써주시면 돼요. 아 이런 얘기 들어가면 더 풍성해지고 좋겠네요. 이거 신청서에도 조금 인용해볼게요. 심지어 병원에 전화하고 병원도 같이 갔다. 신청인이 건강은 괜찮은가요? (??) 가끔 궁적 같은 수술을 감내하기에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분들도 계시거든(호르몬치료의 영향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건강했다...
신청서를 접수하고("쫄?" "ㄴㄴ") 한 달 가까이 지나니 심문기일이 잡혔다. 기일이 일주일쯤 다가왔을 무렵, 신청인을 회사로 불렀다. 마지막에 재판장이 할 말 있으면 해보라고 할 때 할 말을 간단히 적어오고, 법원에 입고 갈 옷을 그대로 입고 오라고 시켰다. 남성 정장을 적당히 갖춰 입었기에 몇 가지 포인트만 같이 잡아보고, 대본을 안 써왔기에 심문기일까지 마음속으로 정리해보라고 했다.
심문기일 당일. 신청인은 애인분과 같이 왔다. 참고로 등록부정정 사건은 비공개진행이라 본인과 대리인 이외에는 같이 들어가지 못한다. 재판장의 허가를 받으면 들어갈 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닌 것 같고 애인분도 강력히 원하시지는 않는 것 같아서 요청하지는 않았다.
카페에서 앉아서 옷차림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신청인용 대본을 마무리했다. 대리인한테도 마지막 의견진술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걸 알다보니 나도 대본 썼다;; '아무 사건'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사실 이쯤 되면 신청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꽤 오랜 시간 함께했다보니 그냥 단순한 사건 같지는 않아진다. 보소 재판장님 이 아이는 내 남동생 같은 아이입니다, 부디 간청컨대 이 아이의 등록부상 성별란 기재를 바꿀 수 있도록 허가해주십시오...
비공개 사건인데, 비슷한 시간대 사건 중 우리 사건이 가장 앞사건이더라고. 5분 전에 들어가서 기다렸다. 재판장님 들어오시면 경위님이 모두 일어서주십시오. 하시니 일어나고, 재판장님이 먼저 인사하시면 우리도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다. 사건번호 부르시면 나가서 일어서 있다가, 앉으라고 하시면 앉는다. 원래 재판 진행은 판사의 전권이고, 이런 사건은 판사마다 진행방향이 워낙 다르긴 해서 어떻게 진행될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감도 안 잡혔다. 일단 신청서에 있는 내용을 간단히 물어보시더라고. 호르몬은 몇 개월 정도 하셨나요, 성전환수술은 어느정도(무엇을) 하셨죠? 좀 짧긴 하네요. 그렇죠? 부모님은 알고 계신가요? 자궁적출수술을 안 하신 이유가 있나요? 전반적으로 질문은 평이했다. 혐오적 언사까지는 없었고,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물어볼 만한 질문을 한다는 느낌.
대리인 진술할 것 있으면 하라고 하시기에 써간 내용을 얘기했다.
(궁적을 안 한 사유와 관련해서 당사자가 경제적 사유만 얘기해서) 추가적으로, 신청인의 건강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어 자궁적출이나 외부성기성형수술은 권장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대리인으로서, 나아가서는 조금 더 가까워진 사이에서 오랜 시간 그의 결정을 지켜봐왔습니다. 저를 찾아온 지 4개월이 조금 더 지났고, 그간 신청인의 가까운 보증인들을 만났고 신청인의 인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호르몬을 맞으며 생긴 변화에 기뻐하며 묘사하는 모습, 부모님과의 갈등을 두려워하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모습, 여자친구를 데려와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 기자 친구를 데려와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한 남성, 나아가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보증인을 만나고 신청서 작성에 비로소 힘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트랜스섹슈얼리즘은 더이상 질병이 아니고, 신청인이 상대적으로 어리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로잡을 선택을 하지 못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청인은 지금 젊고 어리기 때문에, 지금부터 살아갈 오랜 인생을 위해 지금 성별이 정정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청인을 위한 결정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도 더 이야기한 것들이 조금 있었다. 왜 이 법원에 신청서를 넣었는지(등록기준지가 원래 여기였는지), 이 법원에서 정정을 어느 정도 단계에서부터 받아주는지(예: 외부성기성형수술을 안 하고 궁적까지만 해도 받아주는지 같은 것들) 알고 있었는지 같은 것들. 신청인의 성별이 정정되어야 하는 것은 알겠고 신청인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알겠으나 사회통념상 어떠하니... 그러면서 이 사건을 가지고 항고하여 대법원까지 가시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하시는 게 아닌가. 아니 인생에 법원 한 번도 올 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 대법원 가는 게 쉬운 일입니까? 지금 신청인이 사회진출 전에 성별이 정정되어야 인생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두번 세번 말씀드렸다. 나도 대법원 안 가봤어. ㅠㅠ 무슨 소리야. 그럼 판사님도 대법원 가세요...
혼자 수행한 성별정정 첫 사건이고, 아무래도 어려운 사건이다보니 좀 많이 발로 뛴 감은 있다. 두번 하라고 하면 못 할지도 모르겠다. 당사자는 우리 사무실 5번도 넘게 왔고, 보증인도 2명은 데려왔고(보증서는 5장 넘는다), 피검사수치의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신청서에 인용하기 위해서 병원도 같이 갔다. 판사님이 나더러 성별정정 사건 전에 하신 적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 예, 몇 년 전에 다른 멀리 있는 지방법원에서 한 적 있습니다. 결과는 어떠셨어요? (말하기 싫은데) ... 기각돼서 항고했습니다...
잘 안 되면 항고할지, 등록기준지 바꿔서 다시 넣을지는 아직 결정 못 했다. 뭐 어쩌겠어. 그래도 우리 열심히 했다,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