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회고, 황효진 작가의 <어른이 되면 고민이 끝날까?> 북클럽 후기
지난 2월 둘째 주, 예고 없이 친정에 들릴 일이 있었다. 일주일간 머물며 과거의 나의 기록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은 곧 원가족과와의 지난 시간을 회고할 수 있었다. '어떤 가정에서 성장했는지', '우리 부모님의 양육 방식은 어떠했는지', 그로 인해 나는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생각을 가진 청소년이었는지.. 어렴풋이 따라가는 시간 여행이었다.
그 시간의 여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기록물은 중학교 1~3학년 성적표와 고등학교 때 만든 가족신문이었다. 숫자들로 가득 찬 성적표에 선생님의 짧은 편지도 있었다. 미쳐 그때는 유심히 보지 못했던... 그 성적표를 통해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애썼던 나의 시간도 복기되었다. 고3 수능을 봤을 때보다 더 맹렬히 공부했던 그 시기. 그 기록물을 통해 공부는 '습관'임을 알아챘다. 하고 싶을 때 에너지를 모으는 일이 아닌 매일의 습관이 모여 서서히 결과를 낼 수 있는 끈기의 산물.그땐 왜 몰랐을까.
지금도 무언가를 시작할 때, 예열하는 시간이 충분히 오래.. 있어야 하는 사람이기에. 늘 급작스럽게 준비하려다보면... 일시적으로 나 자신이 슈퍼맨이 될 거 같은 기대감에 사로잡힌다.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도 하고...절대 그러하면 안 됨을 알면서도. 늘 미루고 미루는.. 완벽을 기할 때까지 미루는 습관은 결코 미래의 내게 친절한 '과거의 내'가 아닌 것을 잘 알면서도.
가족신문은 20년 전 우리 가족의 캐릭터를 극명하게 잘 보여준 기록물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뉴스레터 같다고 할까. 기존의 나의 취향, 관심사는 20년 전과 다르지 않음을 잘 드러낸 아카이빙물이었다. 사람은 역시 변치 않음을 깨달으며.. 가족 모두 그 기록물을 함께 둘러보며 웃음을 지었다. 가족 모두가 함박웃을 터트리며 함께 미소지을 수 있는 물성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물성을 보관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했다.
지난달 외삼촌의 부재로 인생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한 줌의 재가 되는 우리의 몸은 살아있을 때, 생명을 다할 때 많은 경험과 추억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기에.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조금 더 내 이름을 빛내고.. 내 이름의 가치답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생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질 무렵, 친정에서의 시간은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원가족 모두에게도 감사했던 시간이었다. 늘 뵙고 싶은 부모님의 안식처를 잠시라도 머물 수 있어 기뻤고, 마침 방학기간이었던 아이의 동행도 행복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건 함께한 시간이니깐.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을 맞아 다시 내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그동안 켜놓지 않았던 노트북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책들로 가득 쌓인 서재방의 책상을 정리했다. 한 번에 몰아서 청소를 하는 습관을 버리고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정리를 일상화하기로 했다. 일상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 나의 오랜 리추얼인 '책 읽고 필사하기'를 시작했다. 1권, 2권.. 3권.. 여러 권이 쌓이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은 단단한 하루를 만들어주었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 다이어리에 회고하는 시간관리 기록도 다시 시작했다.
1기에 참여한 후 한동안 눈팅만 했던 '뉴그라운드'의 북클럽에 참여했다. <번아웃의 종말>이란 책으로 3월 동안 책인증과 기록하는 모임에 참여하기로 했다. 황효진 저자가 쓴 <어른이 되면 고민이 끝날까> 온라인 북클럽도 신청했다. 창비에서 펴낸 <어른이 되면 고민이 끝날까>책은 여성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기획된 책이다. 그들이 가장 관심 가질 키워드(진로, 돈, 가족, 몸, 월경)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형태로 구성되었고 저자의 청소년기에 대한 고민과 사례를 담아냈다.
2018~2019년에 출간 제안을 받았으나, 황효진 저자는 기존의 주제와 다르게 변형하여 2021년 초에 지금의 책 내용으로 재기획하여 샘플원고를 만들었다고 한다. 저자가 예전에 펴낸 <아무튼 잡지>에서 청소년기에 접했던 경험들을 쓴 기록들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읽고 창비 편집자가 청소년들 대상으로 한 에세이집 출간을 제안했다고... 작년에 창비 스위치에서 연재 시리즈를 선보이며 올해 초에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고 하니.... 4-5년의 시간이 걸려 책이 만들어진 셈. 그만큼 더 정성스럽고 세상에 필요한 책이 나왔단 거 같다.
저자 또한 지금도 청소년기때와 마찬가지로 '진로'에 대한 고민을 지금도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답이 없는 문제며 누구에게도 물어봐도 답을 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작년에 뉴그라운드에서 진행한 <내 일로 건너가는 법>을 쓴 김민철 작가의 말씀을 언급하며.. 팀장이 되고 나서 무엇을 결정하는 데 있어 책임감이 따라오는데, 김민철 저자는"선택을 하고 선택을 옳게 만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말에 힘입어 황효진 저자는 "어느 선택이든 나한테 옳게, 맞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가면 잊힐.. 아니 사그라질 문제는 영원히 없는 것처럼.. 저자가 청소년기에 고민했던 15가지의 키워드를 통해 온라인 북클럽에 참여한 이들(여성 성인) 모두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지금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적성, 돈, 가족, 친구관계까지... 이 모든 고민의 키워드는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은 듯싶다. 영원히 풀어나가야 할 인생의 숙제...
황효진 저자는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형제자매가 없는 외동이었던 어릴 적에는 가족의 문제와 자신의 문제를 분리할 수 없었는데 마흔이 가까운 지금, 가족과 나의 삶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의 기대에 배반하는 걸 무서워했던 청소년기와 다르게 지금은 좀 더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내 삶을 책임져야 하고 엄마 자신에게 감당할 삶이 있다는 것을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고개가 끄덕여졌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와닿았던 챕터는 '2장 착한 딸 그만두기'였다. 애초 장녀이었기에 내 바람을 부모에게 다짐을 받거나 선언하기보단, 묵묵히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편이었으나.. 침묵으로 일관한 채 몸으로 반항심을 보여줄 때가 종종 있었다. 이유 없이 불만이 쏟아졌던 나는 얼굴빛이 늘 어두었던 중고등학생이었다. 부모에게 말로 전달하지 않고 혼자 삭힌 적도 많았다.
성인이 되면 얼른 독립하고 싶었던 마음이 강렬했다. 서울로. 서울로... 가고 싶은 바람이 더해져 10년간 서울에서의 삶을 이어가다가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도시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부모의 품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고 행복했을 시기였을 텐데. 왜 그리 빨리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결혼도 그런 마음이 더해져 빨리 하고 싶었을지(빨리는 하지 않고 서른이 될 무렵에 했지만..).
(지금 사는 도시에 대한 에세이를 몇 편 모았던)
부산은 제게 언젠가 반드시
떠나야 할 공간이었어요.
부모님 역시 최종적으로는
제가 서울에서 일하고 살아가길 바랐고요.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나고 자라
서울로 떠난다는 건,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성공한 인생으로 이해되기도 하니까요.
이상하게도, 부산에서 제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여성 청소년들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부산에서 나이 드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도록 돕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내가 태어난 곳에서 계속 살아가는 게
실패나 패배는 아닐 거예요.
오히려 용기에 가깝죠. 사는 곳에 발을
단단히 딛고, 그곳을 알고,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속 나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일이니까요.
출처. 황효진 저자의 <어른이 되면 고민이 끝날까?>
나 또한 그녀가 14장에 남긴 문구들처럼 다시 포항에 돌아갈 채비가 된다면, 여성 청소년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포항에서 나이가 드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도록 돕는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포항에 살았던 시기는 불과 스무 해 채 다 되지 않았지만, 나의 고향이었고 내 삶에서 오래 살았던 도시였던 만큼.. 엄마를 떠오를 수 있는 지역.
나를 언제나 품어줄 수 있는 그 도시. 그래서인지 (서울만큼) 많은 것이 갖추지 않아도 그 도시에 가면 몸보다 마음이 평안하다. 출산하고 바로 몸조리하며 갓 태어난 아이와 4개월간 함께 살았던 도시이기에. 내겐 출산, 성장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 도시에 다시 살아볼 기회가 온다면.. 그 도시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 온다면 기꺼이 나의 재능과 능력을 내어주고 싶다. 그렇기에 지금의 삶을 더 열심히 살고 싶다. 과거의 나를 받아준 도시.
책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청소년기의 나, 지금의 여성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콘텐츠는 그레타 거윅 연출의 <프란시스 하>와 글로벌 저널리스트였던 손지애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이자 외교부 문화협력대사의 <손지애, CNN, 서울> 책이다.
2014년에 개봉한 <프란시스 하>는 당시 영화관에서 봤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최고의 영화로 손꼽고 싶을 만큼 여성 청소년, 20대 여성들에게 권하고 싶은 콘텐츠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메시지라... 바라는 꿈을 놓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여정기가 참으로 와닿았다. 현대무용수로서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프린시스는 정작 본인에게안무를 만드는 창작 능력을 갖추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그 길로 실력을 쌓는다. 관심 있는 분야를 포기하지 않고 새 능력을 발견하고 적성에 따라 삶을 자리 잡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추천하고 싶은 또 다른 콘텐츠는 유년시절 존경했던 한 인물인 글로벌 저널리스트 직업을 가진 손지애 저자의 삶을 책. 신간이 나왔던 2016년, 북토크에 참여했는데 당시 일하며 결혼으로 인한 고민이 컸었던지라 저자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며 현답을 얻을 수 있었다. "100세 시대이다. 급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라", "아이를 낳는 타이밍은 없다", "자기가 행복하는 일을 하라", "혼자 다 할 수 없다. 같이 어려움을 나눠줄 사람을 찾아라" 등 아이를 세명 낳으며 워킹맘으로서도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그녀의 여정을 듣다 보면.. 존경심을 더해 내 삶에도 열정을 다 하고 싶은 동력이 생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은
실패할 확률이 높은 만큼
성공에 따른 보상이 엄청나다.
선구자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라"는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보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보는 것.
당장의 여건이 열악해도 자신이 원하는 일에 일단 몸을 던져보기 바란다.
그 보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달고 높을 것이다.
출처. 손지애 저자의 <손지애. CNN. 서울>
(아래와 같이 2021년에도 그녀의 책에 대해 언급했었다)
삶에 있어 동력이 되는 인물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 경이롭다. 남은 생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좋아하는 인터뷰 콘텐츠도 많이 다루고 싶다. 어떤 주제로, 어떤 그릇에 담을지 고민이 되지만 우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정진하며.. 천천히 나만의 길을 구축하고 싶다. 남들은 가지 않는 나만의 길로.
*덧.
함께 북클럽에 참여한 메이트분이 추천해 주신 콘텐츠 4개.
박서련 저자의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와 박소연 작가의 <재능의 불시착>..
모두 소설이다. 이어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황효진 저자가 강추한 영화 <벌새>까지..
3월에 훑어봐야 할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