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일 차를 마시며 글 쓰는 모임 TWC에 참여하며)
매주 목요일, 차를 마시고 글을 쓰는 온라인 모임에 함께하고 있다. 뚜렷한 목적이 있어 이 모임에 참여하는 건 아니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마음에 들어서. 혼자 글을 쓰는 시간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보다 같은 시간대 같은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어쩌다보니 에디터가 만든 모임이라 12명의 참여자들이 모두 에디터들)
똑같은 주제로 글을 쓰는 모임이 아닌,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서 모이는 이 모임에서는 각자가 쓰는 글을 공유하지 않는다. 각자가 글을 쓰는 목적은 다양하다. 자신을 위한 글쓰기 마감 또는 업과 관련된 글쓰기 마감 등 각각의 마감 목표를 세워 글쓰기 시간을 나눈다. 나의 경우 전자. 매일 무언가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유독해야 할 과제가 늘어날 경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쓰기가 매우 어려워진다.(글을 쓰며 마음의 평안을 찾을 때도 많기에.)
가슴 안에 무언가 계기를 마련해 줄 때 글을 시작하는 나로선, 이런 루틴이 꼭 필요했다. 매일 쓰는 훈련이 체득된 사람은 제외겠지만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매일 같은 시간 툭치면 글쓰기가 절로 나오는 작가들을 마주한 경험은 사실상 많지 않았다. 강연회장에서 만난 김영하 소설가님도 매일 쓰는 루틴보다 (예상과 달리) 글쓰고 싶은 욕구, 주제가 생길 때 휘몰아치는 글쓰기를 택한다고 하셨다.
하루키처럼 되고 싶어 2020년 복직 이후 글 쓰고 책 읽는 시간을 '출근 전 시간'으로 잡았다. 약 2년간 비약한 발전을 했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가졌던 사회 초년생 시절, 글쓰는 두려움이 있었다. 쓰다보니 그 두려움이 사라졌다. (자주 쓰지 않으면 스멀스멀 다시 되살아나지만) 나의 가장 큰 핸드캡은 '글 못쓰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보니 글을 못 쓰는 게 아닌, 내 전공의 글쓰기 장르를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트라우마를 벗어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지난 2년, 회사에 몸담을 때 더 악착같이 글쓰기 마감을 했던 거 같다.
그와 달리 소속이 없는 지금, 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24시간이 주어진 요즘. 마감을 하려면 기약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늘어진다. 글쓰기의 종점은 마감이 있어야 가능한 점도 그러하다. 어쨌든 초고를 써야 퇴고를 할 수 있고, 마감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것처럼. 이 글을 쓰면서도 여러 사이트를 염탐하다가 이 페이지에 종착했다. 내 생각의 실타래를 한꺼번에 일렬로 작성하면 좋겠지만, 생각보다 글감을 모아 한 주제의 이야기를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어찌 보면 요즘 글 쓰는 데 몰입감이 적어진 이유가 '갈증'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나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읽기 쓰기' 시간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우선시되었는데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읽기 쓰기'가 가능한 요즘, 출퇴근해야 할 회사가 없고 이달에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가족 돌봄을 우선시에 두고 있다. 내 인생의 큰 변화가 아닌데, 내가 책임져야할 존재의 성장 단계에 집중하다보니 내 일상은 예전보다는 심심한(?) 편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 지루한 루틴일 수 있으나, 오히려 정신 건강에는 이로운 루틴을 보내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는 거라곤, 나의 커리어에서 눈에 띄는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 이 불안은 (나의 성향에 비추면) 소속감을 가질 때 사라질 텐데, 사업계획서를 쓰는 지금 단계에서 '내 사업체를 가질 때 다시 생겨날 수 있을까' 리는 질문에 '네'라고 확답을 할 수 없겠다.
지난 12년간 직장인으로 삶을 살았던 만큼, 대등한 기간(프리랜서였던 지난 3년을 포함하여 차후 사업체를 가진 대표가 된 기간)에 12년 동안 또 다른 직함으로 버텨나간다면 '기존의 관성을 이겨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추측일 뿐이다. 확신이 아니다. 예측만 할 뿐이다. 내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는 요술구슬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삶이란 예측할 수 없는 변수로 인해 전환점을 가진다. 그 때 터닝포인트처럼 잊지못할 큰 경험을 가져다준다.
매일의 루틴을 가져가는 것도 내일의 오늘이 어떻게 펼쳐질지 미리 가늠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같은 시간대 똑같은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스스로에게 위안과 평화를 가져온다면. 그것만으로 우린 예측 가능한 내일을 미리 살며 희망을 가질지도 모른다. 매일 현관으로 배달된 종이 신문을 줍는 아이에게 헤드라인 제목을 읽게 하는 것, 일기를 쓰도록 도와주는 일. 지난해 12월부터 매주 가고 있는 주말 미사나 띄엄띄엄이지만 몸을 혹사한 다이어트가 아닌 주 1~3회씩 들를 수 있는 (아이의 영어학원과 같은 층인, 집 가까이에 공공체육관에서 운동하는 비용만큼 저렴한) 요가원을 찾아낸 낸 것. 되도록 매일 저녁을 집밥을 차리고 먹는 일. 올해가 되어 새롭게 내 일상의 행위가 되어버린 것들은. 결국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다.
그 평화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여유를 가져와준다. 타인에게 친절해진다. 일정한 거리감이 있어도 충분히 우린 각자의 삶을 잘 지켜내며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는 방증을 알려준다. 고로 타인에 기대와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내 하루를 살아가는 나를 지켜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일의 나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보다 내일의 내가 잘 살아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올 때, 마감을 지켜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