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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가장 고요한 절경, 금오름을 오르다

+105, 두번째 오름

by Remi

제주살이 중 주말이면 어김없이 자연으로 향한다.
섬의 바람은 늘 방향을 바꾸지만 마음이 향하는 길은 한결같다. 이번에는 아이들과 반려견 코코를 데리고 금오름에 올랐다. 예전부터 분화구가 아름다운 오름으로 이름난 곳. 사진으로만 보던 그 초록빛 곡선이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었는데 실제로 마주한 순간 그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명불허전. 왕복 40분 남짓의 길이었지만 정상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한없이 넓고 고요했다.



금오름은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있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달리다 보면 넓게 트인 들판 한가운데에 금오름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바람이 다가왔다. 제주 바람은 계절의 온도를 품고 있다. 이른 가을의 공기에는 여름의 끝자락과 초겨울의 예감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오름 입구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작은 안내판 하나, 그리고 사람들이 걸어 만든 흙길. 아이들은 초입부터 신이 났다. 발밑에 부드럽게 깔린 흙의 감촉이 좋다며 뛰어가고 코코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낯선 냄새들을 탐색했다. 길은 완만했고 숨이 찰 틈도 없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엄마, 여기 진짜 화산이야?”
“응, 아주 오래전에 불을 뿜었던 산이야. 지금은 이렇게 평화롭지?”

아이들의 얼굴 위로 빛이 떨어졌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고 시간은 잠시 멈춘 듯했다.




금오름은 반려견 동반이 자유로운 곳이다.
목줄만 착용하면 누구나 함께 오를 수 있다. 주말이면 반려견과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많다. 그날도 작고 귀여운 강아지들이 곳곳에서 뛰어다녔다. 코코는 금세 친구를 사귀었다. 서로 냄새를 맡고 잠시 함께 걷다가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장면이 마치 작은 인사 같았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하늘이 가까워졌다.
양옆으로 억새가 흔들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귀를 스쳤다. 아이들은 흙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우리 발자국이 여기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이 오래 남길 바랐으니까.



정상에 다다르자 바람이 달라졌다.
그냥 ‘세차다’는 말로는 부족한 마치 세상의 모든 방향에서 동시에 불어오는 듯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 속에서 금오름의 분화구가 드러났다.




깊고 부드럽게 움푹 들어간 초록의 그릇.
그 안에 오래된 시간과 침묵이 담겨 있었다.
분화구를 내려다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치 지구의 숨결을 바로 앞에서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멀리 한라산 능선이 보였고 그 아래로 작은 마을들이 점처럼 흩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진짜 신기하다”며 감탄했고 코코는 바람에 귀를 펄럭이며 내 곁에 앉았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풍경이 나를 통과하도록 두었다. 왕복 40분, 짧은 산책길이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오래 걸은 여행 같았다.




하산길은 오를 때보다 더 고요했다.
바람의 방향이 달라졌을 뿐인데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아이들은 흙길에 떨어진 들꽃을 주워 코코의 목줄에 꽂아주었다.


길 끝자락에서 뒤돌아본 금오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거대한 분화구와 그 위를 감싸는 하늘, 그리고 그 안을 천천히 흘러가는 바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조금 변해 있었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느려지고, 조금 더 지금의 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금오름은 이름처럼 ‘금빛의 오름’이다.
햇살이 스치면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바람이 불면 초록의 결이 일렁인다. 짧은 길 위에서 배운 건 단순한 풍경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함께 웃고 걸으며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따뜻함이었다.

바람이 불고 하늘이 빛나던 그날의 금오름은

여전히 내 안에서 천천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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