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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독오독 Jan 05. 2024

삶의 기쁨도 슬픔도 없다

#다자이오사무 #인간실격 #내면아이 #두꺼비


 인생 곡선에 아무것도 쓸 사건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일까? 딱히 삶에서 엄청난 희열이나 비극적 순간을 찾으려 함이 아님에도 그래프의 빈칸을 채우는 일이 K에게는 어려운 과제였다. 행복은 순간순간 곁에 있고, 사소한 것이며, 마음에 달렸다는 것 그녀도 익히 들었다. 어떤 사건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은 교육학도인 그녀에게 일도 아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내 의도에 맞게 삶을 포장해야 한다면 그건 억지스럽고 초라한 일이었다.


 인생이 주는 기쁨과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외로움 때문일까. K가 할 수 없이 표시한 그래프의 점들이 0점 주변을 빙빙 돌았다. 뭔가를 성취하고 싶다는 욕구도 없다. 타인에게 마음을 준 적도 없다. 취향도, 취미도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한다. 아무 일 없이 사는 것이 행운이라고. '그리하여 그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그녀는 무사하다. 아무 일 없는 이곳은 안전하다. K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 공간이 쓸쓸했다.


 '앞길 막는 방해꾼 돌을 돌아서 지나가는 두꺼비', 그녀는 이렇게 스스로를 규정하려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래프에 유년기 기억은 표시되지 않았다. 왜 그 기억들은 0점 근처 어딘가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기억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때 혹시 외롭지 않았던 걸까.


 K에게 유년기란 사실 초점 나간 사진과 같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명확하지 않다. 그녀는 실제 그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사진으로 그날을 추측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불분명한 장면 중 조금 선명한 기억, 그곳은 과천 대공원이다. 붕어 지느러미같이 팔락거리는 바지, 하얀 블라우스. 봄이었고 결혼식에 다녀오던 길 같다. 8살 즈음으로 보이는 K는 그녀와 똑같은 단발머리를 한 언니와 물풍선으로 만든 요요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물이 꽉 차 있는 요요는 꽤 묵직했고 위,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투명한 풍선 속 물이 찰랑거렸다. 아버지는 딸기 아이스바를 들고 오셨고, 그리고 어머니, 그녀의 어머니는 분수대에 비스듬히 앉아 장난치는 딸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햇살에 빛나던 밝은 갈색 눈동자. K는 그래프 9점과 10점 사이에 점을 찍는다.

 

 어머니의 웃는 모습이 K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어머니는 그녀를 피했다. 거실에 있다가도 현관 문소리가 나면 방으로 들어가 버리던 어머니.

 "너 가위눌리는 거까지 내가 알아야 하니?"

 "별 것 아닌 일로 아주 난리를 치네."

 "그렇게 크게 말하면 엄마 나가버릴 거야."

 보살펴지지 못한 마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없었다. 수치감, 분노, 두려움.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담담할 수 없었다. 좌절감에 숨죽여 방에 누우면 몸속에 흐르는 피가 느껴졌다. 어머니를 불안하게 하고 원망한 일에 대한 죄책감. 무언가를 기대한 결과가 이렇게 비참한 것이라면 더는 아무것도 바라고 싶지 않다. 그녀는 스스로 감각과 욕구를 차단시킨다. 그렇게 자신을 숨기면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무사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것이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신념. 아무 일도 없는 이곳은 안전하다.


그렇게 자기 팔, 다리 다 잘라버린 K는 말한다. 유년기 봄날, 공원에서 보았던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행복이었다고. 사람들은 그 따뜻한 말에 햇살 같은 미소 짓는다.  




* 니콜르페라는 전형적인 내면아이의 7가지 성격 유형을 설명하였다. 그중 ‘저성취유형’은 비판과 실패에 취약하기에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감정문제는 애초에 피하며,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 믿는다.


* 참고문헌

다자이 오사무, (2004), 인간 실격, 민음사.

니콜 르페라, (2021),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웅진 지식하우스.


* 그림: Egon Schiele, <Self-Portrait with Physa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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