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독오독 Jan 14. 2024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인지부조화  #잘츠부르크

 피아노 연주는 참 신비롭다. 열 개의 손가락이 뇌의 명령에 따라 각각 움직여 조화로운 소리를 만든다. 눈은 손이 아닌 악보를 따라가고, 귀는 손가락이 누르는 건반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뇌는 다시 이 움직임을 기억한다.


 나는 언니들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신체 감각들의 협응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피아노 학원에 가는 건 정말 싫었다.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작고 어두운 방. 악보 읽기가 힘들어 몰래 외워버렸던 연습곡들. 그럼에도 자꾸 틀린 건반을 누르던 미운 손가락.

 "엄마, 피아노 가기 싫어! 그만둘래!"

 "안 돼! 체르니 100까지는 해."

 투정 부리는 아이 학원 보내기 수법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엄마는 이 계약을 지키셨고, 열한 살 나는 당당하게 피아노계를 은퇴하였다.


 그토록 기다렸던 은퇴 후 그 아이는 앞으로 피아노를 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난히 심심했던 어느 날, 아이는 피아노 의자 아래서 한 악보를 발견하게 되었고 돌연 은퇴 의사를 취소하게 된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직관적인 제목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체르니와는 달랐던 감성적인 선율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처음으로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악보를 읽고 피아노를 연습했다.


 멀리 떨어진 두 건반을 동시에 누르기 위해 있는 힘껏 손가락을 쫙 폈을 때의 쾌감, 다시 손끝을 세워 약하게 조여올 때의 여운. 아이는 음의 흐름을 느끼며 피아니스트처럼 고개를 흔들기도 하고 등을 움츠리기도 하였다. 그 음악이 좋았다. 아니 그 곡을 연주하는 내가 좋았다. 아드린느가 아닌 나를 위한 발라드 같았다.


 시간은 성실하게 흘러갔다.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아침 알람이 울리면 세수를 하고 회사에 간다. 커피로 아침을 때우고 주어진 문서를 정해진 절차와 규칙에 따라 처리한다. 틈틈이 주식도 확인한다. 퇴근길, 셀프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는다. 집에 도착한다. 저녁 먹기 귀찮다. 정확히는 먹은 후 치우기가 귀찮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지금이 바닥이라 거짓말하는 부동산 채널을 본다. 은행과 친구가 되어서라도 집을 샀어야 했는데. 어린 왕자가 말했지. 덧셈밖에 안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버섯이라고. 꽃향기를 맡은 적도, 별을 바라본 적도, 누구를 사랑해 본 일도 없는 버섯. 그 피아노 치던 꼬마가 지금 날 보면 버섯이라 할까. 재미없어. 이렇게 살고 있어 미안해. 아무렇지 않지 않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널 위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연주할게.'


 이것이 내가 오스트리아로 여름휴가를 계획한 이유이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광장에는 누구나 연주해도 되는 오픈 피아노가 있다. 은퇴 공연에서 마지막 곡을 남긴 피아니스트의 마음으로 그곳에서 난 피아노를 칠 예정이다. 배낭을 열고 주섬주섬 꼬마의 낡은 악보를 꺼내겠지. 그리고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천재 음악가에게 그의 소나타가 아닌 다른 곡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할 거야. 그다음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연주하는 거야. 어설프지만 진지한 2분 36초의 공연. 수채화 같은 하늘이 펼쳐진 아름다운 이 도시에 사랑했던 음악이 울려 퍼지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아. 소득 없고 사치스러운 버킷리스트. 그런데 좀 설레지 않아?


 그 연주가 끝나면 대성당 옆 노천카페에 가자. 오스트리아에 왔으니 아인슈페너를 마셔야지. 입가 가득 크림을 묻히며 오늘 재밌었다고 말해줘.



*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란 개인의 태도, 신념, 행동 따위가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다고 느끼는 감정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이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고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태도를 바꾸기도 하고(여우와 신 포도), 기존 태도를 강화하기 위해 모순되는 행동을 피하거나 새로운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이러한 조정 과정은 자신을 속이고 잘못된 태도나 행동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개인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 참고문헌/사이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2002), 어린왕자, 책만드는집

김춘경(2016), 상담학 사전, 학지사

우리말샘(korean.go.kr)


* 음악: Richard Clayderman - Ballade Pour Adeline

* 그림: James Abbott McNeil Whistler, <At the Piano>

작가의 이전글 사랑 아닌 사랑에 가까운 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