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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독오독 Jan 12. 2024

사랑 아닌 사랑에 가까운 태도

#박서련 #나,나,마들렌 #백일몽 #취생몽사 #금지된재현

 웃긴 일이야. 당신은 실제 하는데 당신을 만나는 시간보다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


 기억 속 당신은 내게 차가운 사람이야. 일 얘기에만 반응하는 사무적 눈빛, AI 같은 하십시오체. 그리고 묘한 무례함. 시간 될 때 오라고 하고서는 회의에 가버린 적도, 사람을 옆에 세워두고 폴더를 정리한 적도 있었지. 보통 인수인계할 때 파일을 미리 정리해 두지 않나? 준비 안 되었으면 나중에 오라고 하거나.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속상했지만 티 낼 수 없었어. 알아도 상관없을 테니까.


 같은 부서 사람들 일까지 처리하는 것이 일상인 당신.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 착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못 믿어서인 것도 아니야. 그냥 자기만의 절차와 규칙에 따라 많은 일을 처리하지. 오타 하나 없이 칼 같이 정돈되어 있는 서류를 받을 때 남의 장난감을 뺏는 기분이었어. 이거 내가 가져가도 되는 건가. 내가 건들면 마음에 안 들 테니 앞으로 보여줄 일 없어야겠다.


 보통 20분 정도로 끝내는 인계를 3주 동안 하는 책임감. 왜 퇴근을 못했냐, 초과근무는 달고 하는 거냐 후임의 복무까지 살피는 철저함. 왜 냉정한 사람의 친절은 더 크게 느껴질까. 못하겠다고 하는 일들은  이유도 안 묻고 대신 맡아주었지. 알아. 나한테만 그러는 거 아니란 거. 하지만 그런 행동을 조금은 호의라 믿고 싶었던 내 마음을 눈치챈 걸까. 5분밖에 안 걸렸다. 알려 주려는 게 아니라 내가 보려고 쓴 거다. 도와주었지만 공들인 건 아니라고 정확하게 선을 긋는 당신. 그 행동이 업무 이상의 무언가가 아님을 분명히 알려주지. 아주 확.실.히.


 곁을 내주지 않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해. 그 사람에게는 다르겠지. 데이트를 신청하고, 약속 시간에 먼저 도착해 기다렸을까. 좋아한다는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인 건가. 하얗고 작은 손을 잡고 종로 골목을 거닐고, 업무 아닌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겠지. 회사 안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지만 그 사람 눈치는 볼 거야. 표정을 살피고 듣고 싶은 말들로 기분을 풀어주겠지.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 정 떨어지는 말투에 아무 애정도 없는 관계였으면 좋겠다. 아무에게도 관심 없어 보이는 당신 같은 사람이 좋아한다고 하면 어떤 느낌일까. 짧고 뭉툭한 손톱, 긴 손가락이 닿으면 어떤 기분일까.


 ‘나도 이런 생각하는 내가 좀 징그러워.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사랑이 아니고 사랑에 가까운 태도에 불과한’ 이 백일몽 때문에 현실 당신에게 애정 어린 마음이 생긴다면 웃긴 일이야. 매일 보는 사무실 동료보다 당신에게 마음이 간다면 이상하잖아. 그들은 당신과 달리 내게 상냥한데. 납득하기 어려운 일. 그렇게 된다면 참 싫다.


 사실 내 머릿속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지. 그는 내가 만들어낸 당신이잖아.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나?'

 현실에서 당신을 못 알아본 적도 있어. 당신이 S라면, 그 사람은 S2겠지. S는 실재이지만 S2는 실재하지 않아. 이 허상은 취생몽사(醉生夢死). 이 술은 실제 당신의 모습을 지우고, 재현된 당신과 만나게 해. 왜 난 당신을 생각할까. 단지 이 공상이 재밌는 걸까.


 S는 오늘도 내가 요청한 일을 미뤘어. 입력한다고 했으면서 또 안 했어. 독촉 쪽지에 이제 답도 안 해. 그 와중 내가 만든 직원 명부가 마음에 안 드는지 새로 편집해 다시 뿌린 거 있지. 오만하고 재수 없어. 이 상황이 나만 불편하지. 복도에서 만난 당신은 평소와 똑같이 태연해.

 "일이 많으세요?"

 "그냥 하는 거죠. 뭐."

 묻지를 말걸.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경직된 대답. 사무실로 돌아와 앉았어. 이게 뭐야. 어쩐지 분해. 당신 정말 별로야. 만나지 않는다면 실망할 일도 없을 텐데. 당신은 내 꿈을 깨버려. 정신 차리게 하지. 유해한 데이드리밍. 그러니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S2, 네게 하는 말이야.



* '백일몽(白日夢)'은 대낮에 꾸는 꿈으로 실현될 수 없는 헛된 공상을 말한다. 보통 무의식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형태로 쾌락을 느낄 수 있다.


* '취생몽사(醉生夢死)'란 술에 취하여 꾸는 꿈 속에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한평생을 아무 하는 일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에서는 기억을 지워주는 술의 이름으로 나온다.


* 참고문헌/사이트

박서련, (2023),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나, 나, 마들렌, 문학사

마들렌이 소설가를 고소할 거란 뜻을 처음 밝혔을 때에도 나는 바로 이 지점을 떠올렸다. 그건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사랑이 아니고 사랑에 가까운 태도에 불과했지만, 대략 이 년 가까이 살 맞대고 함께 산 과자 친구에게 보다 그에게 더 친밀하고 애정 어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교육학용어사전, (1995), 서울대학교교육연구소, 하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stdict.korean.go.kr)


* 그림: Rene Magritte, <Not to Be Reprodu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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