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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독오독 Mar 24. 2024

분홍빛 눈이 내렸지

#미셸 들라크루아 #파리 #스물아홉 #12월31일

 살면서 단 한 번도 외국에 가본 적 없던 내가 혼자 파리로 떠난 것은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이었다. 꿈이 많다고들 하는 이십 대에 난 왜 배낭여행 갈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을까. 사실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커 그 외에 다른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꿈도, 낭만도 없이 이십 대를 보낸 나에게 스물아홉의 내가 주는 선물, 파리행 티켓. 대책 없고 사치스럽고 멋지다.

       

 12월 31일 밤, 파리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비와 눈이 섞여오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거리를 걸었다. 딱히 분위기를 잡으려는 건 아니었다. 왼손에는 지도를, 오른손으로는 캐리어를 끌고 있어 우산을 들 수 없었다. 코트와 털부츠가 젖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계획하지 않은 일에서 오는 해방감. 습기를 가득 품은 돌바닥은 반짝반짝 빛났고, 붉고 푸른 조명들은 물기를 따라 번져나갔다. 그리고 멀리 에펠탑은 공기 중으로 하얀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5, 4, 3, 2, 1!”     

 건물에서 들리는 카운트 다운 소리, 그 거리에서 난 서른 살이 되었다.


분홍빛 눈이 내렸지(La neige était rose)


 미셸 들라크루아의 <분홍빛 눈이 내렸지(La neige était rose)>를 보았을 때, 그 16구의 골목이 떠올랐다. 1933년에도 파리는 저렇게 빛났었구나. 어두운 밤하늘을 지나 가로등 위로 오면 선명하게 형태를 갖추던 작은 눈송이들. 눈은 붉은 조명에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거리에 축제처럼 내리는 분홍눈. 그래서였을까. 늦은 시간, 길을 잃었음에도 급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내가 그날 보았던 장면을 그도 보았겠지. 기억은 하지만 재현할 수 없었던 모습이 미셸의 그림을 통해 표현된 것이 기뻤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그 시절.


출처: 한경arteTV     https://youtu.be/aoeNZNvdySI?si=X8zWjNGgRCz7jd6s


 미셸의 그림들은 내가 잊고 지냈던 파리 곳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원경임에도 채도를 낮춰 섬세하게 묘사한 노트르담. 실제 이질적인 느낌을 그대로 담은 새하얀 사크레쾨르. 선입견 없이 그저 고향의 모습으로 붉게 빛나는 풍차, 물랭루주. 언제나 묵묵히 파리의 풍경을 비추는 센 강. 그리고 계절과 시간에 상관없이 하늘에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에펠. 비슷한 듯하지만 모두 다르고, 반복되는 듯하지만 새로운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니 나도 파리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풍경을 이토록 담아내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그리움이겠지.

              

 시간은 성실하게 흘러갔다. 소년 미셸도 나도 나이를 먹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공부만하고 일했던 내 이십 대 삶을 연민하지 않는다. 그 또한 스무 살의 바람이자 꿈이었다는 걸 이제 안다. 다시 파리에 간다면 그날도 분홍눈이 왔으면 좋겠다.



그림

미셸 들라크루아, <Moulin Rouge toujours>, 2016

미셸 들라크루아, <La neige était ros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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