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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콰드로페니아 Apr 17. 2021

먼지 쌓인 게임기

영재.

게임은 나의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콘솔 게임이 나의 취미라고 할 수 있다. 콘솔 게임은 주로 혼자서 플레이하는 게임이 많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온라인 게임도 재밌지만 지기를 너무나도 싫어하는 성격 탓에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 경쟁을 해야 하는 게임은 나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각각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세계관이나 서사에 푹 빠지는 경험을 더 좋아한다. 어렸을 때의 나는 장난감 로봇이나 완구를 가지고 놀기보다는 게임 속 세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에게는 게임기가 친한 친구이자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초등학생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플레이스테이션2(PS2)라는 게임기를 받은 것이 내 게이밍 라이프의 시작이었다. 기기를 갖게 된 이후로는 열심히 게임 타이틀을 사모았다. 틈만 나면 옥션이나 지마켓 같은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 들어가 타이틀을 구경했다. 매번 비슷한 목록이었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스크롤을 내리며 시간을 보냈다. 용인 시내에 하나 있던 게임 샵에도 눈도장을 열심히 찍었다. 열심히 돈을 모아서 살 게임을 미리 정해두었다. 나는 그렇게 모은 게임기와 타이틀을 유난히 아꼈다. 게임이 끝나고 나면 CD를 꺼내 후후 불어 케이스에 다시 넣고 예쁘게 닫아놓았다. 티비에 연결한 선과 콘솔은 도로 박스에 넣어 깔끔하게 제자리에 두었다. 사놓은 게임 타이틀이 몇 개인지 아는데도 몇 번씩 개수를 세어보았다. 둘 넷 여섯 여덟…… 쌓아둔 게임 타이틀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가끔씩은 게임을 하지 않을 때에도 CD들을 늘어놓고 추억에 잠긴 채 뿌듯해했다. CD를 보고 있을 때면 게임을 플레이하던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건 공주에 있는 친할아버지 댁에서 엔딩을 봤었지, 이건 게임에서 길을 잃어 한동안 진도를 나가지 못했었는데…… 우연하게 길을 찾았을 땐 얼마나 기뻤던지, 이건 친구한테 빌려주기가 아까울 정도로 아끼던 게임인데 최근엔 해보질 못했네?’ 게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게임기와 CD는 내가 좋아하는 게임의 물성을 충족시켜주었다. 내 손에 잡히는 물건이어야 그것 위에 추억이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PS2는 구닥다리 게임기가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비싼 콘솔의 가격 탓에 새로운 게임기를 살 수 없었다. 나는 비교적 금전적인 여유가 생긴 재작년쯤 새로운 게임기를 샀다.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의 제일 최신 기종인 PS4였다. 게임기를 사기 위해 굳이 국제전자상가까지 찾아갔다. 큼지막한 제품 상자를 안고 나오는데 어렸을 적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던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레는 마음에 집으로 오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임 환경은 이전에 내가 즐기던 때와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게임을 CD로 사지 않아도 온라인 스토어에서 편하게 결제 후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에서는 여러 행사로 할인을 자주 했기 때문에 이따금씩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으로 게임을 구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할인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제는 단골이 된 게임샵에 들러 CD를 샀다. 어렸을 때 게임 타이틀을 모아 뿌듯해하던 컬렉터의 기질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라이브러리의 아이콘들은 직접 사 온 CD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손에 잡히지 않으니, 나중에 직접 만지며 추억에 잠길 일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모습을 언제나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우리 집구석구석을 가꾸는 책임자이자 정리의 달인. 한 지붕 아래에 살기에 반드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존재. 바로 우리 엄마다. 물건을 쓱쓱 잘 치워버리는 엄마와 달리 나는 물건에 정을 많이 붙이는 스타일이다. 오래된 PS2도 예외는 아니었다. PS2에 담겨있는 추억은 나에게 정말 소중하지만 엄마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전원을 켜면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세팅을 해놓았는데, 엄마는 좀처럼 켜지도 않는 오랜 게임기가 언제나 티비 밑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이 많았다. 안 그래도 오래된 게임기가 거슬려 죽겠는데 내가 새로운 게임기까지 사 온 것을 보고는 도대체 저걸 어디에 둘까 걱정하던 엄마였다.


“오래된 게임기는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새 걸 두면 되지 않겠니?”


엄마는 이 참에 PS2를 치워버릴 구실을 찾은 듯했다. 잊을만하면 나에게 오래된 게임기를 치워 버리면 안 되겠냐 물었다. 물론 난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그 말을 흘리려 노력했다. 엄마가 물어볼 때마다 대답을 피하고 어물쩡 넘어갔다. 엄마는 내가 게임기에 가지고 있는 애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작동도 잘 되지 않는 PS2는 어쩌면 정말로 이전과 같은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엄마 말마따나 이제는 먼지 쌓인 그 게임기를 치워야 하나 싶었다.


올해 초, 비행 경유 일정 덕에 오사카에서 하루 머물 기회가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찬 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에 오타쿠 거리로 유명한 덴덴 타운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게임샵과 피규어샵이 모여있었다. 그중 우연히 한 게임샵에 들어간 나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8-90년대 고전 게임들부터 현세대 게임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언뜻 봐도 수천 개가 넘는 게임팩들과 CD들이 시기와 이름별로 깔끔하게 분류된 채 전시되어 있었다. 새 상품처럼 고쳐놓은 오래된 게임기들도 매대에 놓여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이런 물건들을 대체 어디서 구해오나 싶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오래된 게임을 구경하는 사람이 많았고 심지어 구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가게는 우리나라에서 본 적도 없을뿐더러 있더라도 이 정도 규모의 매장을 갖춘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덴덴 타운에는 이외에도 독특한 가게들이 많았다. 지나가다 발견한 한 가게에서는 장난감 카드만 모아서 파는 곳도 있었다. 그 가게에는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유행하던 유희왕 카드나 포켓몬 카드들이 낱개별로 포장되어 매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카드의 상태와 희귀도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듯했다. 이렇게 마이너 한 취향의 매장이 모여있다는 것, 오래된 게임만 다루는 가게나 장난감 카드만 파는 가게가 있다는 것은 그것들을 파는 것만으로 가게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내가 덴덴타운에서 본 그곳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물건에 적극적으로 소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쓸모와 별개로 자신에게 가치만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지갑을 연다. 이런 소비가 가능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취향에 따른 소비를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임샵의 게임기들을 구경하다 보니 티비 밑에 자리 잡은 나의 PS2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것과 같은 모델의 PS2들도 매대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깔끔하게 비닐에 싸여 있는 구닥다리 PS2를 구매하는 사람들을 보자니, PS2에 대한 나의 오랜 애정과 취향을 존중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도 나처럼 각자의 추억을 가지고 오래된 게임기를 사랑하겠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오래된 나의 게임기를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기기에 대한 나의 마음이 더 단단해졌다. 집에 가면 내 PS2의 먼지를 쓸어줘야지. 내 유년기를 함께해 준 게임기에게 고마워해야지. 오래된 PS2의 가치는 쓸모가 아닌 그것이 주는 추억에 있었다. 엄마는 작동도 잘 되지 않는 게임기를 만지는 나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테다. 하지만 엄마의 말을 따라 게임기를 치워버리기엔 그것이 떠올리는 추억이 너무나도 큰 듯하다. 미안해요 엄마. 내 PS2는 그대로 내버려 둬야겠어요.



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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