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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Vol 6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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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콰드로페니아 Jul 05. 2022

냄새가 불러온 기억

승준.

'짱구는  못말려'의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은 팬들 사이에서 명작으로 꼽히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 하나이다. 이 영화 전체에서 냄새가  수행하는 역할은 강력하다. 어른들은 '옛날 냄새'를 맡고 어렸던 시절의 자아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 작중 명장면인 짱구 아빠  '신형만'이 과거를 회상하고 어른으로서의 기억을 되찾는 일련의 장면들은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연출되어있다. 그가 기억을 되찾는  계기는 다름 아닌 신고 있던 신발의 악취였다. 그러나 신형만을 제외한 다른 어른들은 아직도 어린 아이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작중 악역인 '켄'이 어른들을 '옛날 냄새'로 세뇌하여 자신이 원하던 20세기를 다시금 재현하고자 하는 야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전을 완전히 시행하면 무려 '냄새'로도 기억을 되찾을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한다.
 
 영화에서 말해주듯 냄새를 맡으면 특정한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기억과 함께 그때 당시의 분위기나 기분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렇게 떠오른 기분은 그와 연관된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리고 어느새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재현된다. 이를  테면, 나는 비가 내리기 직전 습해진 땅에서 올라오는 흙 내음을 정말 좋아한다. 그 냄새를 한번 맡고나면 아늑하고 포근하다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곧바로 갈색과 나무 의자, 빗물이 고여 생긴 웅덩이 속 도시의 붉고 노란 빛들과 빗물이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토도도독 같은 소리가 연상된다.
 
 나는 이런 기억들과 함께 편안한 기분 속으로 착 가라앉는다. 특정한 향이나 냄새로 우울증을 치료한다는 아로마 테라피처럼 비 냄새만  맡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데 이 기분은 어디서 왔을까? 내가 빗속에서 겪었던 기분과 기억들이 좋게 남아있기 때문일까. 도대체  어떤 경험 때문에 빗속의 기억과 냄새 사이에서 기분 좋은 감정을 연상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비가 오면 기분이 좋아.’라고  말하면 음침한 사람 취급받기 딱 좋은 데도…… 어쨌든 비가 오는 게 좋다. 그 처음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언제였는지 기억 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냄새와 기억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떠오른다. 이미 오래되어 잃어버린 기억이 냄새로  다시 되돌아오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옛날 집에서 나던 은근한 냄새가 훈련소 생활관에서 떠오른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날이 되어서야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한 달 가까이 생활관에서  지내고서야 옛날 집에서 살면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한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오래된 장소에서 풍겨오는, 그러나 불쾌하지만은 않은  눅눅한 냄새. 이 냄새는 ‘집에 왔구나.’를 단번에 실감나게 해주었다. 어렸을 때에는 그 냄새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상태라 무뎌져  있었다. 그러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군대 생활관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이런 냄새 속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구나.’ 하는 막연한 현실감이 훅 다가왔다.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기억나지 않는 때의 기분이 떠오르는 건 순전히 냄새 덕분이었다. 어떤 냄새로 과거가 떠오르는 일은 이  외에도 수없이 많다. 당시에는 익숙해져서 실감하지 못했던 기분이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뚜렷한 기분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냄새는  쌓이고 쌓이다보면 익숙해져서 새로운 감각을 일으키지 못하나보다. 하기사 옛날 집에 살았을 때에도 그 냄새를 매일 실감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내 일상 어딘가를 항상 채우고 있는 주변의 냄새는 기억에 무의식적으로 달라붙는다. 나중에라도 그 냄새  비스무리한 것을 맡으면 금새 떠오르는 게 그 이유다.
 
 한달 전에 구매한 디퓨저도 이제는 새롭지 않다. 코를 앞까지 가져가고 나서야 ‘아, 이런 냄새였지.’ 라는 생각과 함께 처음  디퓨저를 뜯었던 날이 떠올랐다. 디퓨저 공병에 담긴 액체는 절반 정도 남아있다. 거꾸로 된 모래시계처럼 하늘로 솟아버린 냄새  속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익숙해진 냄새를 코 밑에 가져다 대면, 그 첫 만남이 떠오른다. 불편한 압박감과 헤아릴 수 없는 미래가  주는 불안감 따위가 강렬해진 냄새 속에서 더 생생하다. 한달 전만 해도 고시 공부를 하며 맡던 냄새였다. 얼마 전 시험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지금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금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냄새가 나중에는 어떤 모습으로 내게 돌아오게 될까. 다시는 맡고 싶지 않다는 기분보다 그립고 아련한  만족감이 남았으면 좋겠다. 냄새를 통해 떠오른 과거와의 만남은 묘한 기시감을 남긴다. ‘내가 그랬었구나.’ 라는 발견마저도  익숙하고 반갑다. 고시 공부를 하며 힘들어 했던 내 모습은 너무 자주 봐서 익숙하고, 어릴 적 살던 집에서의 생활에서는 익숙한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냄새는 과거의 기억을 천연덕스럽게 내 현재로 던져두고 지나간다. 그때의 기분과 지금의 기분이 만나면서  어떤 깨달음으로 남는다. 날 둘러싼 배경이 어땠는지, 그리고 그 속의 나는 어땠는지 어렴풋하게 알게 되면서 ‘나’라는 인간이 갖는  내용이 더 풍부해지는 느낌이 든다. 시험이 끝난 지금, 디퓨저 향 밑에서 그때의 기분과 마음을 돌이켜본다. 새로운 출발선이 내 발  앞에 그어지고 있다. 과거의 기분이 냄새를 통해 지금의 나에게 어떤 감정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니. 영화 속 ‘짱구 아빠’의 경험과  비슷하게 여겨진다.
 
 어릴 적 비 내리는 풍경 속에서 기분이 좋았다고 느꼈던 날은 어떤 하루였을까. 별로 흥미가 없었던 체육 수업이 취소 되어서  좋아했을까? 아니면 비가 내릴 때만 느낄 수 있는 아주 조용한 침묵이 나를 편안하게 했던 걸까? 내일 비가 온다면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길 바라본다.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내가 어쩌면 물안개 속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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