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준 Feb 06. 2020

이제는 치앙라이

치앙마이에 고개가 갸웃거려질 때

소개한 사람의 말만 믿고 맞선 장소에 나간 사람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대방을 만났을 때처럼,  소문을 듣고 치앙마이에 들어선 여행자는 전해 들은 바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순간 당혹감을 느낀다. 아무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이야기를 해도 언니의 화장품을 몰래 바르고 거울 앞에 선 사춘기 소녀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얼굴에 분을 칠하고 입술에는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한 치앙마이에게 그 순전했던 모습은 이제는 오래된 여행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 오래된 이야기의 희미한 모습을 못 잊는 여행자가 찾아가는 곳이 치앙라이다.


치앙라이를 가기 위한 버스는 치앙마이에 있는 3개의 터미널 중 아케이드 터미널이라고도 하는 제3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치앙라이까지는 약 160km, 3시간 여를 달려가야 한다. 치앙마이 항동의 한적한 숲 속에 있는 숙소에서 며칠을 보내고 찾아온 나이지만, 너무나 한산한 터미널 모습에 제대로 온 것인지 잠깐 불안해진다. 사방을 둘러봐도 치앙라이행 버스를 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만한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대기실 의자에 짐을 내려놓고 버스 부스를 찾아가 무뚝뚝한 직원으로부터 출발 승강장을 확인한다. 치앙마이는 여행자들에게 지쳐 있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 승강장으로 가니 이미 버스는 대기해 있고 사람들은 짐을 싣고 있다. 승객들의 반은 외국인이다. 도저히 무게를 감당 못할 것 같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젊은 여성이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배낭을 내려놓는다. 배낭에는 미처 들어가지 못한 흙투성이 등산화가 그녀의 거칠었던 여행을 보여주듯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다.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는 좌석이 3열로 되어 있는 고급 버스다. 아마도 오늘의 버스 여행이 그녀의 가장 사치스러운 여정일 것이다.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북동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도로변의 건물이 낮아지고 공터가 많아진다. 버스의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길가에 있는 상점의 간판들도 그 수가 작아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길로 접어드는 버스를 보며 치앙마이가 분지의 도시라는 것을 실감한다. 길은 쉼 없이 휘어지며 오르다 다시 내려가고 옆으로는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파헤친 황톳길에서 끊임없이 뱉어내는 흙먼지를 뚫고 운전자는 길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열심히 핸들을 움직인다.


머리 위의 에어컨 바람을 조절하는 레버를 잠가도 한기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바람막이를 꺼내어 입고 야자나무와 파인애플이 곳곳에 서 있는 열대의 풍광을 기대하며 차창 밖을 보지만, 뜻밖에도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간간이 스쳐가는 축 늘어진 넓은 잎의 바나나 나무뿐, 길게 자란 잡목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것이 초록이 좀 더 강렬한 여름날 강원도 산길의 모습이다.


산을 오르고 내리던 일을 반복하던 버스는 한참 만에 작은 마을로 들어선다. 길가에는 낡았지만 비루하지 않은 작은 상점들이 소소하게 늘어서 있고 찻길을 따라 좁게 이어진 골목들 사이로 소박하고 아담한 시골집들이 푸른 초목들과 함께 산촌의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진고동 색의 나무판자를 덧대 만든 북부 지방의 오래된 전통 가옥들도 드문 드문 눈에 띈다. 동남아시아의 전통 가옥들이 대부분 그러듯이 이곳에서도 아래를 비워 놓고 한 층을 띄워 집을 들인다. 이 작은 마을에도 황금빛 불탑을 가진 사원은 어김없이 들어서 있다. 이방인의 눈에는 마을의 규모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크고 사치스러워 보이지만 이곳의 주민들에게는 아직도 많은 것이 필요한 사원일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먹구름이 보인다. 버스는 머뭇거리지 않고 구름을 향해 다가가고 차창에는 빗방울이 부딪치기 시작한다. 초록의 산야는 빗물을 머금고 힘을 내서 회색의 산길에 청량함을 더한다. 버스는 구름 속을 지나고 이제 비는 절정에 달한 듯 시야를 가리며 쏟아져 내린다. 공사 중이던 포클레인이 길가에 세워져 있고 인부들은 어느 곳으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황톳길은 차분해지고 이제 비는 잦아든다. 그리고 버스는 마침내 치앙라이에 들어선다.


시원하게 툭 터진 길이 시내를 향해 길게 뻗어 가고 그 한 편의 들판은 초록으로 질펀하다. 버스는 큰길에서 방향을 틀어 신버스터미널인 2터미널에서 잠시 정차하여 사람들을 내려준 후 다시 시내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대형 쇼핑몰인 센트럴 프라자와 빅씨를 지나치지만 아직 도로는 한산하다. 매연과 쉴 새 없이 질주하는 스쿠터들로 가득 차 있는 치앙마이의 거리와 비교하면 이곳은 그야말로 청정지역이다. 도로의 차들은 한가하고 스쿠터들도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만 거리를 지나간다.


내가 내려야 할 곳은 구터미널인 1터미널이다. 버스는 나를 내려주고 종착지인 매싸이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난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크게 새것과 옛것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새 버스터미널이 그다지 새것처럼 느껴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이 터미널의 주요 고객은 태국 북부 고산지대의 마을 사람들이다. 미얀마와 국경을 맞댄 매싸이와 골든 트라이앵글의 도시 치앙쎈으로 향하는 완행버스가 이들이 타고 가야 할 버스다. 버스들은 정면 유리창에 단정하게 경유지를 크게 써붙이고 짙은 원색으로 칠갑을 한 채 오랜 나이를 숨기고 조신하게 서 있고, 한낮의 태양 밑에서 경유지를 외치는 차장들은 어서 빨리 손님들을 태우고 자기들의 세상인 산골짜기로 떠나려고 소리 높여 호객을 하고 있다.  


볼 것이나 놀 곳을 찾는 여행자라면 치앙라이는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다. 사람 사는 곳이면 태국에서는 늘 있게 마련인 사원들은 이곳 치앙라이도 예외가 아니지만, 보통의 사원을 찾는 것은 여행자에게는 이미 치앙마이로 충분하다. 남은 선택지는 백색사원인 왓렁쿤과 왓렁쿤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청색사원, 왓렁쓰아텐 정도다. 치앙라이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황금 시계탑도 그리 강력한 인상을 주지는 못하고 여행 가이드에 소개된 몇몇 장소도 억지로 끼워 넣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스타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싱하파크 역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찾는 여행자에게는 그리 추천할 만한 곳은 아니다. 청춘의 밤을 불면으로 이끌 장소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치앙라이는 치앙라이라는 도시 그 자체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서 가는 여행지다. 치앙라이에서 아직 도시의 주인은 사람이다. 도로를 따라 겨우 들어선 건물들은 고개를 낮추고 고양이는 사람들 곁을 찾아오며 길을 배회하는 개들의 눈빛은 순하다.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비로소 손님이 되어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손님을 대하는 얼굴은 맑고 웃음은 환하지만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다. 거리의 차량들은 사람들에게 온순하며 큰길에서 갈라져 가는 골목들은 작은 상점과 식당을 품으며 소박한 집들을 깔끔하게 이어간다. 도시는 평온하며 수수하고 조용하다.


치앙라이를 남과 북으로 가르는 콕강은 숲을 키우고 공원과 리조트와 음식점에 그 곁을 내주며 메콩강으로 흘러간다. 콕강 언저리에는 원래의 주인인 열대의 식물들로부터 최소한의 공간만 빌린 사람들이 터를 닦고 집을 지어 살고 있고, 그 사이로 휘어지며 느릿느릿 연결된 길들이 여유롭다. 콕강을 건너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깨끗하고 아름다운 교정을 가진 라차밧대학교가 나오고 그 옆으로 넓은 넝부아 호수가 펼쳐진다. 여행자는 아침 안개가 있는 그곳에서 침잠하며 잠잠히 소요한다. 무료하고 무기력한 하루가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를 듣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치앙라이는 그곳을 거니는 것만으로 아무 근거도 없이 삶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하는 도시다.


온통 흰색으로 뒤덮인 왓렁쿤은 이것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치앙라이를 방문할 정도로 유명한 사원이다. 나는 터미널에서 왓렁쿤행 버스를 찾는다. 빛바랜 파란색의 낡은 버스가 운전석 차창에 white temple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놓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운전기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행색을 보고는 왓렁쿤을 찾는 여행자임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미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빈자리가 몇 개 없다. 운전석 옆에는 엔진룸이 튀어나와 있고 그 맞은편에 좌석이 하나 있어 얼른 자리를 잡는다.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버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이 정도라면 아마도 박물관에 가서도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버스를 타보았지만 내 기억에 이 정도로 연식이 아득한 버스를 타본 기억은 없다. 칠이 벗겨진 창문이 다 열린 채 오래된 선풍기가 천장에서 털털거리고 운전석 계기판은 테이프로 여기저기 땜질이 되어 있다. 출입문은 원래 닫히지 않는지 활짝 열려 있고 좁은 의자에 간신히 걸친 엉덩이는 심하게 떨리는 자동차 덕분에 계속 들썩거린다.


버스가 움직이자 뒤편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일어서더니 알 수 없는 말을 한마디 하고 뒤에서부터 차례로 버스비를 받아 나온다. 아마도 버스비를 받겠는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흰 피부에  밝은 인상의 할머니는 손님들과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요금을 깎아 주기도 한다. 나에게서 돈을 받은 할머니는 고맙다며 활짝 웃는다. 나이가 지긋한 운전기사와는 말 한마디 안 하지만 서로 닮은 얼굴 분위기로 보아 부부가 분명한 것 같다. 아마도 이 버스가 이 내외의 평생 호구지책이었을 것이다.


가는 듯 마는 듯 치앙라이의 넓은 길을 한가롭게 달리던 버스는 얼마쯤 지나 정거장 표시도 없는 교차로에서 차를 세운다. 운전기사는 내쪽을 보더니 손을 내젓고 나는 황급히 도로로 내려선다. 털털거리며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버스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쫒는다. 고개를 둘러보니 대각선 쪽으로 하얀색의 사원이 보인다. 나는 횡단보도도 없는 8차선 도로를 적당히 눈치를 보고 건넌다.


뜻밖에도 왓렁쿤 앞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들어차 있다. 치앙라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왓렁쿤은 높은 담 뒤편에 숨어 있지 않다. 얕은 물길로 경계를 구분했을 뿐 밖에서도 전체 모습을 다 볼 수 있다.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사원은 하늘로 치솟는 흰색의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 같다. 본당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나는 걸음을 멈춘다. 지옥의 고통 속에서 구원을 갈구하는 모습이 처절하다.


욕망이라는 지옥을 넘어 천국으로 향하는 과정을 조형화했다는 사원은 순결한 백색이 고통과 공포라는 이미지와 섞이면서 기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우리의 삶이 투영된 저 고난을 목격하는 마음은 그리 편치 않다. 사원을 만든 작가는 지옥의 심연을 건너뛰어 천국의 문을 열라고 재촉하지만 선뜻 따라나서기에는 너무나 불가능해 보이는 권면이다.


조형물을 만들 때 사용한 석고에는 유리가 섞여 있다. 그 유리 덕분에 본당에 이르는 길은 찬란하다. 나는 그 눈부신 길을 걸어가 천국의 문을 넘어 본당에 들어간다. 본당에는 부처님의 전신 그림을 배경으로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불상이 좌중을 압도하고 있다. 불상의 얼굴은 자비가 그대로 형상화된 모습이다. 어둠이 아침의 태양빛에 흔적조차 없어지듯이 그 앞에서 나의 모든 죄와 악행이 아무 조건 없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다. 그가 나를 그저 사랑하며, 나를 용서하고 내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왓렁쿤의 부처님은 본당 밖에도 있다. 그분들은 공사 중인 전각 밑에서, 대중들의 집회 공간에서,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오늘도 그윽하게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백색사원의 기이한 화려함에 끌려 이곳에 온 여행자는 예기치 않은 부처님의 자비 덕분에 마음의 무거운 짐을 털고 고요히 문을 나선다.


태양이 고개를 숙이며 하루를 마감할 즈음이면 하루 종일 숙소에서 빈둥거리던 여행자조차도 자리를 털고 거리로 나선다. 작고 낡은 3층 건물의 옥상에 억지로 만들어진 루프탑에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는 청춘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가끔씩 터지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거리에 번져 나간다. 화덕구이 피자집 종업원은 텅 빈 홀을 나와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슬쩍 말을 건네고, 길 건너 고양이 카페는 건방진 고양이에 눈을 뺏긴 아이들과 어른들로 북적거린다.


해가 넘어간 거리는 어둡다. 가로등은 이따금씩 모습을 보이지만 흐린 불빛으로 비추는 건 자신 뿐이고 띄엄띄엄 문을 연 상점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겨우 거리를 밝힌다. 불빛의 징검다리를 밟고 옷매무새가 의심스러운 마사지숍의 아가씨를 흘끔거리며 여행자가 향하는 곳은 나이트바자다. 나이트바자는 구터미널과 길을 건너 마주 보고 있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던 치앙라이의 밤은 나이트바자에서 비로소 기지개를 켠다. 문을 닫은 상점들로 퇴락한 공장지대처럼 을씨년스럽던 한낮의 나이트바자는, 저녁이 되면 화려한 색깔의 상품들과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다. 규모야 치앙마이에 비할 수 없지만, 어둠을 헤치며 쏘아대는 불빛 아래서 사는 자와 파는 자의 욕망이 하루를 무사히 마친 여유로움과 섞이면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돈에 대한 자제력이 약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핸드메이드를 강조하며 다소 비싸게 느껴지는 가격에 어떻게든 정당함을 부여하려는 상인들은 진부한 설득을 이어가고, 여행자는 스카프를 한 올 한 올 짜내려 갔을 산골짜기 여인의 시간과 수고를 어떻게 계산해야 적당할지 궁리 중이다.


옷이나 기념품에는 이미 식상한 여행자라도 밥은 먹어야 한다. 나이트바자의 한쪽 광장은 오직 먹기 위한 공간이다. 광장 중앙에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넓게 늘어서 있고 그 전면에 공연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음식을 파는 매점들은 광장을 둘러싸며 한 평 남짓한 공간으로 어깨를 맞대고 이어져 있다. 매점의 수만큼 음식의 종류도 많지만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숯불이 들어간 작은 화로에 옹기를 올려놓고 고기나 해산물을 야채와 함께 끓여 먹는 핫폿이다. 눈썰미가 좋은 주인은 핫폿을 주문하고 대충 자리를 알려주면 사람으로 가득 찬 테이블 사이를 뚫고 정확하게 찾아온다.


이곳에서야말로 여행자는 진짜 여행자가 된다. 손님의 대부분은 치앙라이 주민들이다. 앞자리에 앉은 젊은 부부는 서너 살밖에 안됐을 사내아이와 함께 핫폿을 끓인다. 엄마의 무릎에 앉은 아이의 작은 입은 식힌 국수를 받아먹느라 연신 오물거리고, 아빠는 부지런히 고기며 야채를 옹기에 넣고 간간이 캔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느라 바쁘다. 옆자리의 연인들은 테이블에 가득한 음식들은 안중에도 없이 한밤의 밀어를 나누느라 뜨겁다.


무대에 놓인 작은 의자에 기타를 하나씩 든 두 남자가 자리를 잡는다. 왼쪽의 남자가 작은 노트북을 만지자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에코가 과장된 마이크에서는 기타 소리와 함께 두 남자의 발라드가 화음을 맞춘다. 이국의 이름 모를 노래에 감탄하는 건 그저 모든 것이 새로운 여행자뿐이다. 노래가 끝나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바쁘고 여행자의 어색한 환호와 박수소리만이 겨우 들린다.  


몇 곡의 노래를 마친 가수들이 퇴장하자 한 사람이 올라와 의자와 마이크를 치운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태국 전통음악이 울려 퍼지고 무대를 비추는 조명의 색깔이 붉은 톤으로 바뀌더니 전통의상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 무용수들이 하나씩 무대로 나오기 시작한다. 키나 몸집이 제각각인 무용수들은 TV에서 보던 춤사위를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손동작이나 몸놀림은 의욕으로 그친다. 공연을 위해 전문적으로 만들어진 무용단이 아니라 동네 처녀들을 되는 대로 불러 모아 몇 번 연습을 시켜 내보낸 것이 분명하다.


열대의 밤하늘은 후덥지근한 더위를 던져버렸다. 오랜만에 청량감을 느낀 사람들은 이미 무대를 잊었고 여행자의 시선만 여전히 희망을 품고 무대로 향해 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무용수들의 얼굴은 자신감 가득하고, 동작도 맞지 않고 손가락은 제대로 꺾이지 않으며 허리마저 돌아가다 말지만 그녀들의 춤은 계속 이어져 간다. 무대 위의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서, 무대 밑의 사람들은 무대 밑의 세상에서 오늘을 즐거워한다. 치앙라이에서는 틀린 것은 없고 다른 것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곳, 치앙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치앙마이, 랑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