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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준 Feb 08. 2020

치앙마이, 선데이마켓

여행자의 시장

선데이마켓은 매주 일요일마다 올드시티의 동쪽 문인 타패 게이트와 치앙마이의 대표적 사원 중 하나인 왓프라씽을 잇는 약 1km의 랏차담넌 로드를 차단하고 열리는 난장을 말한다. 하지만 그 길과 연결되는 거의 모든 골목 또한 온갖 수공예품과 옷, 기념품, 먹거리를 파는 좌판으로 변신해 올드시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장터가 된다. 이 시장에 제법 좌판이 펼쳐져서 이곳저곳 둘러볼 만한 규모가 되기 시작하는 것은 오후 4시부터다. 그러나 4시의 태양은 여전히 뜨거워서 6시 이후에 타패 게이트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그 시간이면 해는 지고 상인들도 모두 자리를 잡아서 그늘을 찾아 헤맬 일도, 군데군데 휑한 아스팔트만 쳐다보는 일도 피할 수 있다.


태국 제2의 도시라는 치앙마이에서 여행자의 다리가 되어 주는 것은 그랩과 픽업트럭을 개조해서 사람을 태울 수 있게 만든 썽태우다. 썽태우는 아무 곳에서나 탈 수 있고 아무 곳에서나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택시와 같지만, 정원이 10명이나 되고 이미 차에 타고 있는 사람과 방향이 같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작은 버스와 같다. 썽태우가 다가오면 손을 들고 목적지를 말한다.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면 타고 가로저으면 다시 다음 썽태우를 기다린다. 기사는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다. 물론 요금을 물어보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만.


고개를 가로젓는 두 명의 기사를 보낸 후, 나는 타패 게이트로 향하는 썽태우에 올라탄다. 좌우로 하나씩 두 열의 좌석이 세로 방향으로 놓여 있다. 먼저 타고 있던 사람들과 마주 보며 나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다. 서로 다리가 맞닿을 정도로 좁은 실내라서 내 시선은 상대를 피해 뒷문을 향한다. 뒷문은 쉽게 내리고 탈 수 있도록 언제나 열려 있다. 멀리 정상을 구름에 내준 왓프라탓의 산, 도이수텝이 보이고 일요일의 연인을 태운 스쿠터가 썽태우의 뒤를 쫓는다.  


난마처럼 얽혀 있다는 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방콕 도로변의 전선줄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치앙마이의 도로 풍경 역시 방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층층이 겹쳐진 수십 개의 새까만 전선줄은 서로 얽히고설켜 건물의 전경을 가로막으며 도로를 따라 길게 이어져 가고 있다. 전선은 우리의 아우성을 실어 나르는 전령이고, 아우성은 목소리와 문자로 표현되는 우리의 욕망이다. 땅 속에 묻혀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흘려보내야 할 우리의 욕망이 거침없이 자신을 드러내며 치앙마이의 도로 위를 썽태우와 함께 달린다.


중간에 몇 명의 승객을 더 태운 썽태우는 올드시티의 해자를 끼고 유턴을 한 다음 방향을 바꿔 이제 동쪽으로 향한다. 다 무너져 내린 성벽 때문에 구별을 할 수 없지만 이미 나는 올드시티 안쪽의 도로로 들어온 것이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음악소리가 커지기 시작하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썽태우는 타패 게이트까지 미처 가지 못하고 승객들을 내린다. 타패 쪽으로는 이미 차량들이 길게 늘어선 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타패 게이트에서 랏차담넌 로드로 들어서려면 작은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몇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이 좁은 이차선 도로에 치앙마이에서는 보기 힘든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참 기묘하다. 한참을 신호등 불빛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중년의 백인 남성이 다가오더니 씩 미소를 지으며 신호등 기둥에 달려 있는 버튼을 누른다. 일종의 수동 신호등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면서 숫자는 열을 세기 시작한다.


신호등 맞은편에는 길가에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있다. 버튼을 눌러 준 남자는 나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그 카페의 테라스로 가서 자리에 앉아 영어로 가득 찬 신문을 꺼내 든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일상인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한가한 치앙마이 여행자의 풍경이다. 나는 그를 떠나 선데이마켓에 들어선다.


나에게 호의를 베푼 이 남자를 나는 그 후 몇 번 더 마주쳤다. 치앙마이에서 생활하는 동안 익숙한 여행지였던 타패 게이트를 지나갈 일이 서너 번 더 있었는데, 그 남자는 그때마다 카페의 그 자리에 앉아서 신문을 들고 있었다. 때로는 커피 잔이 앞에 놓여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엇을 먹은 흔적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서양 음식을 파는 그 카페는 손님의 대부분이 서양인이었고 항상 그들은 안에서 서너 명씩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는 늘 혼자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를 구경하며 신문을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신호등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버튼을 눌러 주는 것이 그의 치앙마이 생활법이었던 것이다.


선데이마켓은 여행자의 시장이다. 여행자의 욕구와 필요에 대한 치앙마이의 응답이다. 구경꾼과 상인들로 거리는 이미 가득 차 있고 좌판마다 밝힌 불빛으로 밤은 저만큼 물러서 있다. 몰려든 사람과 시장의 규모는 러스틱마켓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다. 곧 지갑은 빠르게 비어가기 시작할 테고 양 손에는 비닐봉지가 겹겹이 들려 있을 것이다.


선데이마켓 역시 태국 북부 주민들의 감탄할 수밖에 없는 손재주를 보여주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지만, 러스틱마켓이 일정의 취향으로 선별되어 있는 것에 비해 여기는 그보다 훨씬 다양하다. 대량으로 만들어진 시장용 상품부터 하나하나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제품까지 품질도 가격도 각양각색인 상품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는 진정한 시장이다. 썽태우 기사처럼 이곳의 상인들도 말이 없다. 상인들 대신 그들의 상품들이 말을 한다. 호객을 하는 외침도 없고 마지못해 응하는 흥정에도 몇 마디 말로 끝을 낸다. 목소리가 높은 것은 여행객들이다. 먹고 떠들며 감탄하는 소리에 치앙마이의 밤거리가 들썩거린다.


좌판은 길을 따라 양 옆으로 늘어서 있다가 곧 가운데까지 새 줄을 만들어 길을 둘로 나눈다. 고개를 돌려가며 혹시 놓치는 것이 있을까 부지런히 양 옆으로 늘어선 좌판을 구경하던 나는 사람들을 따라 이제 왼쪽 길로 들어선다. 한쪽 길을 포기하는 것이 아쉽지만 워낙 좌판의 수가 많은 만큼 비슷한 상품을 파는 좌판도 많다는 데 위로를 삼는다.


이 거리에서 가장 많은 상품은 북부 지역의 전통적 문양이 응용된 원단을 이용한 것들이다. 옷은 물론이고 이 원단에 온갖 재능이 더해지면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기발한 소품들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 파스텔 톤의 색상이 겹쳐지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아무 이유도 없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 진다. 나의 눈은 인디고 위에 가을 낙엽색의 선과 도형을 교차시켜 만든 원단에 멈춘다. 원단에서는 고산지대에서 사는 삶의 고단함과 그 풍광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 날은 랏차담넌 로드의 사원들도 상인들에게 자신들의 성소를 내어준다. 고기를 굽는 냄새가 사원 안에 퍼지고 국수를 볶고 생선을 튀기고 밥을 짓는 중생들을 피해 스님들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음식들은 잔칫날만큼 풍성하고 사원 구석구석은 허기를 채우는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익숙하게 음식을 입에 넣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한 손에 든 음식이 곧 입 안에 들어가 어떤 향과 맛을 낼지,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머뭇거리며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고 확신을 구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나는 이제 나이트마켓 옆으로 넓게 자리를 잡고 있는 치앙마이 경찰서 앞을 지나간다. 도로변에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와 함께 세련된 서체의 한글로 ‘치앙마이 경찰서’라고 써진 간판이 보인다. 그 옆에는 남국의 향취를 느끼게 하는 몇 그루의 코코넛 나무가 허리를 곧게 펴고 높게 치솟아 있다. 그 끝을 쫒아 고개를 젖히니 잘 익은 코코넛 한 무리가 보이고 그 너머로 치앙마이의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환하다. 일상을 피해 도망쳐 온 여행자도 달의 추적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달에 번지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피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여행자의 마음이 허허롭다.


선데이 마켓에서 자주 변주되어 나타나는 것들 중에 슬리퍼와 수제 공책이 있다. 슬리퍼는 치앙마이 시내의 쇼핑몰에서도 다양한 디자인을 볼 수 있지만 이곳의 슬리퍼는 좀 더 토속적이고 창의적이다. 가죽과 나무, 짚과 같은 천연의 소재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지만 슬리퍼를 판매하는 가판대마다 디테일에 집중해서 디자인의 확장에 한계가 있는 상품의 벽을 넘는 기발한 시도를 자주 볼 수 있다. 공책에 차별화를 가져오는 것은 표지다. 표지 역시 원단이나 얇게 깎은 나무와 같은 특이한 소재를 사용하기도 하고 직접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 넣어 하나뿐인 상품을 만들어 낸다.  


선데이마켓에도 음악이 있다. 이곳의 물건들만큼 여기에서 연주되는 음악들의 수준도 다양하다. 랏차담넌 로드가 양 옆으로 길을 내주는 교차로에 자리를 잡은 밴드는 교대로 태국 음악과 흘러간 팝을 노래한다. 평안하고 감미롭지만 러스틱마켓의 발랄함과 젊음은 없다. 오늘 밤 그것을 보충하는 것은 9살의 소녀 로커 페티락이다. 강렬한 일렉트로닉 기타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페달을 밟았다 떼면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실력은 이미 프로다. 앞에 있는 TV 모니터에는 페티락이 공연하는 영상이 흐른다. 아마도 오늘의 버스킹은 홍보용인 듯하다. 9살 소녀의 에너지와 날카로운 전자음이 쇼핑에 지친 여행자들의 힘을 돋운다.


왓프라씽의 거대한 황금빛 불탑이 눈에 보이면 이제 거의 끝에 온 것이다. 도로변의 레스토랑 2층에는 맥주잔을 든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앉아 열린 창을 통해 거리를 내다본다. 나는 그들의 풍경 속에 아무 의미 없는 하나의 점일 뿐이다. 누군가의 의미가 되는 일이 버거웠던 여행자가 이제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싶어 진다. 왓프라씽 앞에서 이제 막 선데이마켓에 들어선 사람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고, 지친 나는 길게 늘어서 있는 썽태우에 다가가 행선지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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