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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우울증이었나 봐(프롤로그)

by 까미

난 20대 때 가을이 싫었다.
임용시험이 보통 11월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낙방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되니까.

나 같이 교대를 다녔던 경우에는 4학년에 올라갈 때부터 본격적인 임용 준비를 한다. 1월부터 스터디를 꾸리고 단체로 인강을 듣는다. 개강하면 본격적으로 암기에 들어가고 스터디에 가동한다. 불볕더위가 오는 6-8월이 공부의 중요 시점이다.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열심히 외우고, 쓰고, 스터디를 하고, 모의고사(모고)를 푼다. 9월부터는 새로운 내용을 배우기보다는 이미 공부한 내용을 다지는 시간이다. 1년을 잘 완주한 대부분의 교대생들은 무난히 합격을 한다.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던 2011년 여름, 매일 밤새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새벽 5시쯤에 기숙사로 기어들어갔다. 누가 날 알아보는 것이 싫었다. 거의 과에서 유일했던 '임포자(임용포기자)'였다.

9월에 벼락맞은 듯 두 달 정도 시험을 준비했지만 당연히 불합격. 교대의 특성상 거의 대부분의 재학생이 시험에 붙었다.

과 인원의 10프로 정도가 낙방했다. 나만 안 된 거 아니라고, 재수 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2년 한 해 동안, 난 단 1시간조차 공부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밤새 게임을 하다가 오전 내내 잠을 잤다.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PC방이나 서점으로 도망을 갔다. 퇴근 시간 때 부모님을 피하는 게 목적이었다.

임용 재수 때 또 떨어졌다. 공부를 안해서 재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 시기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8월 즈음에 윈룸이라도 하나 잡고 공부를 해보려고 50여권이 넘는 수험서들을 집 앞 골목에 잠깐 내놓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던 부모님 차를 가져와 싣는 게 목적이었다.

차를 가지러 간 15분 정도?의 시간 사이에 재활용 수거 트럭이 내 수험서를 모두 싹 실어갔다. 버리는 책인줄 알았나보다. 경찰에 신고하고 cctv까지 확인했지만 그 책들은 찾을 수 없었다. 원룸 계약은 취소하고 그 해 시험을 또 포기했다.(이 때 책을 분실했던 걸 아직도 부모님은 모르신다)

3수 때에도 도저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장시간 컴퓨터 게임으로 인해 늘 지끈거리던 머리, 불면증, 가족과의 갈등, 굴러다니는 컵라면 봉지와 이따금 손대던 담배갑, 기름으로 엉겨붙은 머리카락과 거울에 비쳐지는 시체 같은 몰골...

폐인 생활을 3년째 하던 날이었다. 광화문 교보문고 바닥에 앉아 아무 책이나 읽고 있었다. '우울한 현대인에게 주는 번즈 박사의 충고'라는 책을 읽다가 내 눈을 의심했다. 자동적, 비관적 사고, 심리적 자해 행위.. 이거 완전 내 이야기 아니야?! 그 때 받은 충격과 책 표지가 아직도 선명하다.

중학생 때부터 있었던 자기 비하와 대인기피, 낯가림, 나트륨 중독.. 이런 게 우울증이라는 거구나. 내가 '환자'일 수 있겠구나.

다음 카페에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쳐 보니 '이미 아름다운 당신'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가입해보니 대인기피가 있는 사람들이 정기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과의 만남을 극도로 기피하던 나인데 홀연히 정모에 나갔다.

그 곳에 나간 후 12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확실한 건, 난 지금 살아있다. 극단적 생각까지 했던 내가 살아있다. 지방이지만 임용도 붙었고 연애도 했고 결혼도 했고 육아도 하고 있다. 이제 나쁜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운동에 학을 뗐던 내가 달리기를 하고 있다. 10km를 완주하고,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고, 25년 가을 풀코스 완주까지 목표로 월 100km 이상 뛰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분이 우울 증상이나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내 글이 기꺼이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을 드리고 싶다. 다만 그 길은 혼자 갈 수 없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과 인연을 만나고 연습이 필요하다. 전문가의 진단과 약물, 상담의 도움도 필요하다. 난 모든 과정을 경험했고 글로 이를 풀어보려 한다.

요새 러닝 기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살아있다는 것, 뛸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한국 사회는 아프다. 자살율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속에서 건강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날 칭찬하고 싶다.

평소에 별로 우울하지 않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행복한 삶을 받으신거다. 좋은 부모와 좋은 환경과 좋은 인연이 있을테니까.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나를 비롯한 세상의 인연들이 당신을 도와줄 테니까.

가슴 속에 품고 살았던 그 이야기를 이제 브런치에서 꺼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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