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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Oct 09. 2024

남 탓

이만큼 나이를 먹으니 이제 어딜 가든 나보다 나이와 경험이 많은 여자선배들은 찾기가 힘들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또 출산이나 육아와 관련한 선배들이 생기겠지만, 결혼하지 않고 아직 일을 하고 있는 여자 선배들은 확실히 내가 20대 때와 비교하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할 때도, 모임을 할 때도 대부분 나보다는 어린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고민상담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내가 그들의 눈에는 고민을 털어놓을만한 어른이나 선배로 보이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한참 동안 고민들을 듣고 내 나름의 생각들을 얘기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만히 되짚어보면 ‘그러고 보니 정작 내 고민은 털어놓을 곳이 없구나’ 하는 쓸쓸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내가 듣는 고민들의 대부분은 역시나 인간관계에 관한 것들인데, 사실상 그 안에는 자존감에 대한 고민이 바탕에 깔려있다. 좀 더 당당하고 상호 간의 소통이 원활한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은데,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 말이든 행동이든 주저주저하다가 정신 차려보면 언제나 ‘을’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나의 10대와 20대 초반의 시절을 떠올려보면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의견이 있어서 말하려고 하다가도 ‘혹시나 이게 아니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주저하게 되고, 내 의견대로 했다가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좋지 않으면 모든 게 내 탓이 될까 봐 두려워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을 택했다. 나 역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대단한 자존감을 가진 강인한 어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가져다준 좋은 것들 중 하나가 나 자신에 대해 예전보다는 잘 알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나 자신을 더 알아갈수록 내가 나 설상황과 나서지 말아야 할 상황을 판단하는 기준이 더 명확해졌고, 마주한 상황과 그 상황에 대처할 자세에 대한 확신이 더 뚜렷해지면서 자존감도 어느 정도 채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완벽한 인간은 아니기에 당연히 아직도 종종 시행착오를 겪곤 한다. 다만, 그럴 때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자책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나쁘게 흘러갈 때 자책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렵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이나 ‘그때 차라리 이렇게 했다면’하는 모든 후회들은 결국 내가 못나서, 내가 능력이 없어서로 귀결될 때가 많으니까. 자책하는 마음을 아무리 접어두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을 때, 자존감이 바닥을 쳐서 다시 올라오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느껴질 때, 나는 최후의 방법으로 ‘남 탓’을 한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타인을 비난하고 몰아붙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마음속으로만 아주 작고 귀엽게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누군가를 진짜 미워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나 자신이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자존감만 지켜내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멈춰진다. 


나를 지키기 위해 속으로만 하는 남 탓은 귀엽게 봐줄 수 있지만, 나를 돋보이게 하려고 남을 공개적으로 끌어내리려는 남 탓이나 나의 잘못을 덮기 위해 입 밖으로 꺼내놓는 남 탓은 더 이상 귀엽지 않아 진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넘쳐나는데,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는 대표적인 상황이 바로 회사에서 회의를 하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회의는 무슨 종류가 그렇게도 많은 걸까? 부서장회의, 부서회의는 기본이고, 부서와 부서끼리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을 땐 그렇게 부서끼리 뭉쳐서 회의를 하기도 한다. 대표님이 참석하는 회의와 참석하지 않는 회의도 있고, 어떤 문제나 새로운 안건이 생기면 또 회의... 회의... 이쯤 되면 회의하려고 회사에 출근하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하긴 ‘회사’의 ‘회’와 ‘회의’의 ‘회’는 같은 한자어를 쓰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회의를 가져봤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만나온 회의실의 풍경은 마치 사냥터와 다를 바 없었다. 누가 먼저 우위에 서느냐에 따라 어떤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리더의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고, 어떤 큰 문제의 책임자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든 안 좋은 상황에서 발을 빼기 위해 다른 팀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까발리면서 서로 인상을 쓰며, 아이디어를 내지 않는 사람은 한순간에 일에 열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 되는 곳이다. 일이 잘 안 풀리기라도 하면 당신네 팀이, 당신이 잘못한 탓이고, 일이 잘 풀리면 우리 팀이, 내가 잘한 탓이라며 니탓 내 탓을 가름해 보는 곳. 

여럿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의논한다는 ‘회의’의 의미처럼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좋은 상황은 어떻게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지,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안 좋은 상황에서 발을 빼려고 남 탓을 하고 깎아내리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한 번도 ‘일을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온 사람들은 머지않아 너무나 쉽게 그 성이 무너진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팀이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회의실에서 무거운 책임을 면해야 하는 것도 어찌 보면 팀장의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책임을 면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야 하고, 그런 모습의 나를 마주하는 순간 물밀듯이 밀려오는 자괴감에 괴로워진다. 나 자신에게도 당당하지 못한 마음으로 현명하게 팀을 지킬 수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 팀의 팀장이 안 좋은 상황에서 발을 빼기 위해 자신의 팀원에게로 탓을 돌리는 것도 아주 많이 봤다. 물론 그런 팀장들 또한 존경을 받지도, 오래 살아남지도 못하겠지만.


나 역시 팀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나 역시 능력 있는 팀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회의실에서 야무지게 팀을 지켜내지도 못했고, 우리 팀을 회사의 핵심부서로 이끌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내가 팀장이 되던 순간,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은 딱 한 가지였다. 절대 팀원에게 잘못을 넘기지 말 것. 팀원이 실수를 해서 문제가 생겨도 부서장 회의에 가서는 엄연히 내 잘못인 게 맞다. 부서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 팀원을 깎아내려 자신을 지키는 팀장보다는 팀 내에서 해당 팀원에게 질책을 할지언정 부서장 회의에서는 팀원관리를 못한 내 탓이 맞으니까. 속으로는 ‘내가 다른 팀장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된 건 다 그 팀원 때문이야.’ 라며 남 탓으로 내 마음을 지키더라도 현실에선 온전히 책임을 지는 게 내가 되고자 했던 팀장이었다. 내가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그 모습이 잘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나는 팀장의 자리를 팀원에게 떠넘기는 꼴이 되었으니까.

사장의 갑질이 지나쳤던 그 회사에서 결국 나는 퇴사를 결심했고, 퇴사한다는 나를 붙들고 울던 후배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자기는 이제 어떡하냐며, 본인은 팀장이 돼서 사장님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왜 버리느냐고. 그때도 느꼈다. 나는 끝까지 좋은 팀장이 되지 못한 채로 발을 빼는구나. 결국 팀을 지키지 못했구나. 그리곤 속으로 또 남 탓을 했다. ‘이건 갑질로 직원들을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사장 탓이야.’라고.

그리고 후배가 팀장이 되었을 때, 말도 안 되는 사장의 갑질 밑에서 겪게 될 모든 힘든 순간들에 ‘자책’이 아닌 내 탓을 해주기를 바랐다. 자기 살겠다고 팀원들을 두고 떠난 전임 팀장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면서 내 탓을 해준다면, 후배의 마음도 내 마음도 편해지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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