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무릇 사람에게서 가장 많은 상처를 받지만, 또 사람에게서 가장 많은 치유를 받는 존재인 것 같다.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인류애가 모조리 바닥나 버렸다고 입버릇처럼 넋두리하는 나지만 카페에서 손님이 커피가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워주실 때나 내가 그린 라인드로잉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청첩장이 잘 나올 것 같다고 말씀해 주시는 손님들을 만날 때마다 내 머리 위로 행복한 자막이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인류애가 +1 충전되었습니다.’
사계절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하시는 나이가 지긋한 여성분이 있다. 커피를 좋아해서 온 동네를 누비며 거의 모든 카페를 다 다녀봤는데 우리 매장의 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그중에서도 내가 만든 커피가 제일이라고 하시며 거의 매일 루틴처럼 들러 카페라테를 주문하시는 분이다. 내가 라테아트를 해서 드리면 너무 예쁘다면서 매번 잊지 않고 감탄사를 보내주시는 분. 식물을 좋아해서 젊은 시절엔 화원이나 꽃집을 운영해보고 싶었지만 못했고, 대신 집에서 많은 식물을 키우고 있다고 하셨다. 우리 매장 안에 있는 식물들에게 주라며 영양제를 챙겨 오시기도 하고, 가끔은 흙이며 화분이며 잔뜩 들고 오셔서는 화분이 작은 식물들을 분갈이까지 해주시곤 한다.
우리 매장에는 크고 작은 커피나무 화분이 몇 개 있다. 신경을 많이 써주진 못하지만 고맙게도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꽃이 지고 나면 열매를 맺기도 한다. 매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매일 똑같이 느껴지는 하루하루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봄과 여름은 한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아무도 모르게 성장하는 식물을 관찰하는 것이 참 재밌는 시기라 매일아침 출근하면 식물들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첫 번째 일과일 때도 있다. 커피나무에 열매가 맺히고 또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붉게 익기 시작하는데, 가장 빨갛고 통통해졌을때 열매를 따서 반으로 가르면 보통 두 개의 씨앗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씨앗 표면에 묻어있는 점액질을 잘 씻은 후 뚜껑이 있는 투명 혹은 반투명 통에 물에 적신 키친타월을 깔고 그 위에 올려 불린다. 미처 씻겨나가지 못한 점액질에서 곰팡이가 생길 수 있어서 주기적으로 다시 닦아주고 키친타월도 갈아주다 보면 씨앗 한 귀퉁이에서 작은 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때 배양토에 심어주면 얼마 뒤 흙속에서 고개를 내민 커피나무의 새싹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중에는 아예 발아가 되지 않고 불리는 과정에서 썩어버리는 씨앗도 있다. 발아가 되어 흙에 심어도 결국 잎을 틔우지 못하고 사그라들기도 한다. 그렇게 내손으로 씨앗을 틔워 사람으로 치면 어린이 정도 되는 커피나무로 키운 화분 3개가 매장에서 자라고 있었다. 2개는 해가 드는 창가에 두었고, 하나는 좀 시들한 것 같아 늦은 봄부터 여름 내내 가게밖 출입문 입구에 두었다. 라테를 드시는 그 손님도 매장에 있는 어린이 커피나무 셋과 큰 커피나무 하나를 한눈에 알아보시고는 본인도 하나 키워보고 싶다면서 나중에 판매할 생각이 있으면 자신에게 꼭 말해달라고 하셨다. 안 그래도 그 손님이 가져다주신 영양제와 좋은 흙 덕분인지 몇 년 동안 꽃을 피우지 못하고 웃자라기만 하던 홍화접이 아주 예쁜 노란 꽃을 피워냈던 터라 사장님도 나도 너무 기뻐하며 말씀하셨던 커피나무화분이라도 하나 선물로 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그날도 홍화접의 꽃을 감상하며 역시 식물을 잘 키우는 손을 가진 ‘그린텀브’의 소유자가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있었고, 매장 입구에서 한결 파릇파릇해진 어린이 커피나무 하나를 그분께 선물로 드리면 어떨까를 논의하며 입구 쪽을 바라봤는데, 엊그제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있던 커피나무 화분이 온데간데 없어진 사실을 알아차렸다. 봄부터 여름의 끝자락까지 내내 바깥에 내놓았지만 한 번도 누군가 훔쳐가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카페에서 핸드폰을 두고 화장실을 가도 누군가 훔쳐갈 걱정은 하지 않는 나라인데.. 분명히 엊그제 퇴근할 때 커피화분의 존재를 확인했고, 그다음 날은 매장의 정기휴무였으니 화분도둑은 아마 정기휴무였던 날에 등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CCTV를 돌려보자 어렵지 않게 범행현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화면 속 범인의 모습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어?!’ 하는 소리가 나왔고, 사장님을 비롯한 모두가 그 라테손님이 아니냐고 단번에 입을 모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습이 흡사했다.
라테손님은 매장의 정기휴무를 알고 있었고, 화면 속 그 사람의 발걸음은 한치의 머뭇거림이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바로 커피나무 화분을 향하고 있었다.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매장 안을 한번 기웃거리고는 주머니에서 준비해 온 비닐을 펼쳐 화분을 담고 다시 성큼성큼 제 갈길을 가는 모습에 CCTV화면을 보고 있던 모두가 말을 잃었다.
워낙 식물을 좋아하시는 분이니 커피나무가 안쓰러워 분갈이라도 해주시려던 게 아닐까 생각하며 라테손님이 또 커피를 마시러 오시기를 기다렸다. 아니면 모두가 화면 속 범인을 잘못 본 것이기를, 라테손님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누군가가 범인인 것이기를 바라며 기다렸지만 열흘이 넘도록 라테손님은 오지 않았다.
‘인류애가 -10 되었습니다.’
내 머리 위로 이런 자막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 세상에 가장 믿지 못할 것이 검은 머리 짐승이지.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해놓고, 나는 또 누군가를 믿으려 하고 있구나. 누군가를 쉽게 믿었다가 손해를 본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속는 셈 치고 해 보자고 했다가 정말로 된통 속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여태 살아오면서 피부로 겪어놓고는 사람이란 참 간사해서 그 시간들을 모조리 잊고야 말았구나 탄식하며 길에서 만나면 눈길도 주지 않을 거라며 소심한 복수의 계획을 세우던 즈음 라테손님이 유유히 매장에 등장했다.
과연 그분의 입에선 어떤 말이 나올지 라테손님이 매장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상상들을 했다. 뒷춤에서 화분을 꺼내며 분갈이를 해왔다고 하시려나, 아니면 너무 탐이 나서 나도 모르게 화분을 가져갔다고 이실직고하실까? 그런데 현실은 매우 달랐다. 라테손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고, 커피를 주문하고, 스몰토크를 이어갔다. 한 가지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매일 이야기하던 식물이나 화분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도 내 안에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연기력을 있는 힘껏 꺼내서 최대한 평소와 다르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머릿속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라테손님이 화분도둑이 아니었고 내가 괜한 오해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CCTV화면을 봐도 모두가 입을 모아 그 손님이 확실하다고, 거꾸로 봐도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라테손님은 그 이후로 여전히 루틴처럼 매장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그런 상태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어떤 확률엔 라테손님과 너무나 닮은 누군가가 화분도둑일 가능성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화분 도난사건 이후 느낀 것은 인간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감정이 더 깊어졌다기보다는 내가 여전히 사람을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계속 ‘그 손님이 범인이 아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말이다. 사람에게 속고, 상처받고, 어쩌면 그래서 누구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편안하게 느끼고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내 주변에 믿을만한 사람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어서 내가 계속 사람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 진정한 ‘내 사람’들에게 참 감사하다는 생각.
나중에 받을지도 모를 상처가 두려워서 친해지는데 시간을 많이 두고, 겉으론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도 아직 진짜 속마음은 오래 감춰두는 조심스러운 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내 남은 앞으로의 생에는 또 상처받을만한 일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은 덜 두려워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사람에게 마음껏 좋다고도 해보고, 누군가에겐 속내를 모두 까뒤집어서 보여주고도 싶다. 그러다가 설령 대차게 상처받는 일이 생길지라도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는 다이얼처럼 조금씩 조금씩 돌려 노이즈를 흘려보내고 나면 언젠가는 깨끗한 음질로 선명한 목소리를 듣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바깥에 바람이 많이 불고, 오늘 아침엔 첫눈이 내렸다.
궂은 날씨를 뚫고 오늘도 라테손님이 오실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그저 그 순간만의 진심을 담아서 우유를 적당히 데우고,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예쁜 라테아트를 띄워 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