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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그 Lee Jul 20. 2023

2. 사흘의 약속, 그리고 치킨.

(커버 이미지 출처:교촌치킨-허니콤보웨지감자세트)

복숭아 작업이라니.

내 인생에서 그림이나 영상이 아닌 실제 나무와의

대면은 처음인지라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모르겠

다. 농사일은 처음이다 보니 잘 모르겠어서 언니에

게 물어본다. 무조건 긴소매옷과 긴 바지를 입어야

하고 장소가 비닐하우스 안이 아니어서 잡초가

많으니 장화를 신으라고 한다. 그러나 마땅한

일복이 없다. 뭐 어쨌든 편하게만(?) 입으면 되겠지.

하지만 내가 누군가, 별명이 '보그 리'가 아니던가,

갈 곳이 어디든 그 와중에도 패션은 절대 포기

못한다. 새벽에  그것도 4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지금 미리 준비해둬야지 싶다.


나뭇잎에 팔이 쓸릴 수도 있으니까 일단 자외선과

UV가 차단된다는 소재로 된 얇은 긴소매 블랙 후드 집업에, 바지도 뭐가 달라붙지 않게 매끈매끈한

소재로 된 아래단에 고무줄을 느슨하게 넣은

요가 바지 스타일로 골라 놓고, (일바지를 한 벌

사 둬야겠다.) 같은 블랙으로 리넨 블렌디드 원단의

버킷햇으로 일단 시크하게 올블랙으로 세팅 완료했

다. 그런데 문제는 신발이다. 장화를 신으라고

말해줬는데 내가 가진 장화는 급하게 산에 갈 때,

근처 장에서 1만 8천 원 주고 산 자주색 꽃무늬

장화다. 꽃무늬 아이템은  내 인생에 그전에는

없었는데, 핑크 꽃무늬 하고 두 가지밖에 없어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이렇게 장화신을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진작에 '헌트 레인부츠' 하나

사두는 건데. 후회막심이다.)

그래도 장화 신으라고 할 땐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들고는 가고, 일단은 슬립 온을 신고 가야겠다.


'카톡'

'카톡'

준비 끝내고 자려고 하는데 스님께서 보내신 동영상

이 도착했다. 복숭아꽃 훑어주는 방법과, 열매 솎아주는 방법을 알려주는 U튜브 영상.

"보살님, 남의 일 년 농사이니 꼭 공부하고 오세요."

니예 니예. 암요 스님. 어련하시려고요.

그래도 우리 셋 다 불러서 모아놓고 공부시키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




첫째 날.

도착하니 새벽 4시 20분. (네비 만드신 분, 상 줘야 한다. 못 찾는 길이 없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스님께선 벌써 와 계시다.

벌써 일 시작하고 계신 스님 덕분에 숨 돌릴 새 없이

바로 밭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넓은 밭에 나무가

많다. 근데 여기 말고 다른 곳에 밭이 두 군데나

더 있단다.(큰일이다. 분명 사흘만 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된다. 더 해야 한다

고는 절대 안 하실 거다. 왜냐면 동자님은 '약속'을

칼 같이 지키시는 분이니까.)


복숭아 가지마다 버들강아지처럼 움튼 꽃망울이

가득하다. 세상에나 너무 기특하고 어여쁘다.

그러나 예뻐할 겨를이 없다. 맘 야무지게 먹고

가지에서 아랫부분을 제외하고는 손가락으로

다 훑어내야 한다. 아래로만 열매가 맺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남아서 열매로 크게 자란다고 해도 위를 향한 것은 결국 나중에라도 따 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애초에 깔끔하게 해 줘야 한다.

괜스레 뒀다가 제법 모양이 나게 자란 열매를

따 내려면 더 아깝고 맘 아플 테니까.

열심히 하자.

동자님과 약속한 사흘동안 다 끝내려면.

열심히 움직이자.




둘째 날이다.

이틀 연속으로 새벽에 깨어 움직이고 하면서 루틴

이 깨지니까 밤잠도 설치게 되어 머리도 어지럽고,

처음 해본 몸 쓰는 일이라 어깨랑 손가락이 아프다.

그렇지만 내색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나무 한 그루 겨우 완성할 때 스님은 세 그루,

네 그루를 뚝딱 작업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휴.)


오늘 해야 할 곳은 나무가 키가 크다. 낮은 나뭇가지는 고개를 들더라고 그냥 서서 하면 되는데 높은

곳은 까치발을 딛고 서도 나뭇가지가 손에 닿지

않아 사다리를 타야 한다. 헐, 난 고소공포증 있어서

놀이 기구도 못 타는데.


할 수 없이 사다리중애서도 칸이 몇 개 안 되는

낮은 사다리를 가져오면서 보니, 언니는 겁이 없다.

제일 높은 사다리를 들고 와선 거침없이 올라가더니

나중에 보니 맨 위칸 넓은 곳에 앉아서 작업하고

있다. 나는 주춤거리며 겨우 두단 위에 올라서서

복숭아 가지를 잡아당기니 부러질까 봐 안 되겠다.

망설이다가 한 단을 더 올라가 보니 거기까지는

그래도 가능하다 싶다.

"여기 이렇게 올라와봐, 공기가 달라"

바라보니 사다리 맨 위에서 앉아 언니가 날 바라보

며 웃으며 하는 말이다.

헐, 아무래도 간이 부은 겨.




마지막 셋째 날.

오늘은 두 번째 밭이다. 여긴 잡초가 더 많고 길다.

새벽이다 보니 이슬이 아직 덜 말라서 바지가 다

젖는다. 꿉꿉해서 할 수없이 자주색 꽃무늬 장화를

이제는 신어야 할 때가 왔나 싶다. 장화까지 신고

완전 무장하고 나니 이제 제법 일꾼 같다.(ㅎ)


이제는 사다리 3번째 칸 까지는 여유롭게 올라갈 수

있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멀리 정처사님이 흰 박스

를 들고 오신다. 스티로폼 박스에는  식지 않게

담아 오신 김밥이랑 어묵탕이 들어 있다.

"새벽부터 오셔서 일하시는데 죄송해서 뭘 준비해

드리고 싶은데 일찍 문 연 곳이 없어서요. 이거라도 드실라나 싶어서 준비했네요. 따뜻할 때 좀 드시고

하세요."

평소엔 잘 먹지 않을 단무지랑, 계란., 시금치만 들어간 기본 김밥. 하지만 오늘은 최고다. 일하고 먹는

밥이 이래서 맛나는구나.

정말 꿀 맛이다.


어묵탕 국물이랑 열심히 김밥을 먹고 있는데

저 멀리 키 큰 사람이 뚜벅뚜벅 우릴 향해 걸어와

스님께 먼저 인사하고 우리에게도 정말 고맙다

인사한다. 큰 아들이란다. 우리는 처사님 내외랑은

8년째이니 서로 잘 알고 있지만, 그 아들들이랑은

말로만 들었지 일면식도 없었다가 오늘 처음 봤다.

키가 훌쩍하니 크고 잘생겼다. 인물이야 정처사님이 워낙 좋고 안 보살님도 고우시니 운 좋게도 잘난

유전자 덕분에 아들은 인물이 좋을 수밖에.

(커서 좋겠다. 부럽다.)


본인은 저쪽 세 번째 밭에서 일하고 있다고, 연신

감사하다고 말하고는 다시 일하던 곳으로 간다.

"스님, 다 죽어가는데, 병원에서도 손 못쓰고 포기했는데 스님께서 살려줬다는 그 아들이에요..?"

내가 조그만 소리로 묻자 스님께서 고개를 끄떡이신다. 내 깐엔 작게 말한다고 했는데도 들렸는지

"저 아들 때문에 우리가 안 다닌 병원이 없고

좋다는 거 안 해본 게 없어요. 원인도 모른다고 하고 방법도 없고, 다 가망 없다고 포기하라고 말했는데 스님을 만나서 스님께서 살려주셨지요. 우리 식구랑 내가 보살님들 나이 때 일이니 그게 벌써 25년도

넘은 일이네. 아들을 살려주셨지만 따지자면 나랑, 우리 안식구도 같이 살리신 거지. 그땐 정말 다 같이 죽고 싶었으니까."

정처사님이 걸어가는 아들 뒷모습을 보며 말한다.

그러자 스님께서

"건강하니 저리 잘 살고 있으니 저도 좋지요.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아드님을 살린 건, 제가

한 일이 아니고 모든 건 동자님께서 하라고

알려 주시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또 처사님께서

다 믿고 따라 주신 덕분이지요.."

" 자 이제 먹었으니 다시 일하러들 갑시다." 하고는 후딱 일어나 복숭아 밭으로 가신다.

나는 일 보다 동자님께서 뭘 어떻게 하신 건지

어떻게 의사도 포기한 큰 아들을 살리신 건지

그 내용이 몹시도 궁금했지만, 일해야 하니 다음에

기회를 보아 여쭤보기로 마음먹고 따라 일어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씻고 나오니 톡이 와 있다.

"보살님, 사흘동안 복숭아 밭 일하느라고 수고 많으셨어요. 치킨 한 마리 시켜서 드시고 힘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동자 일동. (꾸벅.)

그리고 염화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


이번엔 문자 알림음이 와서 보니 토스로 3만 원이

입금되었다. 입금란에'치킨값'이라고 되어 있다.

자상하고 귀여우신 우리 동자님 덕분에 웃음이

절로 난다.


'카톡'

이번엔 스님이다.

"치킨 꼭 시켜서 맛있게 드시고 인증샷 보내세요."

"네에. 알겠어요 스님은 맛있는 거 안 드시나요..?"

카톡 답을 보냈더니

"동자님이 나는 안 사주세요. 보살님들께만.

그리고 정처사님이 고맙다고 복숭아 농사 잘 되어

맛있게 여물면 보내주신다고 하네요."

"네에. 치킨 맛있게 잘 먹을게요.

스님께서도 정말 고생하셨어요. 공양 드시고요.

참, 그리고 내일 찾아뵈어도 될까요..?

정처사님네 큰 아들 살린 이야기 해주세요.(ㅎ)"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그 버들강아지 같았던,

겨우겨우 살짝 움트고 있던 애기 열매가, 몇 달

사이에 이렇게 잘 자랐다. 솜털이 예쁜 핑크색

두 뺨을 발그레 붉히고는 나를 찾아와 우리 집

현관에서 달콤한 향기를 날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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