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이미지 출처: 네이버)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자 달콤한 향기가
훅 들어온다.
"뭐지..?"
현관 신발장옆에 있는 나무벤치 위에 못 보던
상자가 있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벌써 알겠다.
복숭아다. 그것도 2Kg짜리 두 박스가.
가져다 놓았을법한 동생에게 전화하니
지난번 일손을 도와준 농가에서 답례로 주신 거라
한다. 생전 처음 그림이나 사진 말고 직접 실물로
만난 어여뻤던 복숭아꽃과, 애기 새끼손톱만 했던
열매였는데. 벌써 이렇게나 자랐다고..?
몇 달 전, 4월 초의 어느 날.
이른 새벽시간의 암자.
영험도의 기도군에 위치한 공수면에서 조금
더 들어가는 작고 호젓한 시골, 성불리에 자리 잡고
있는 역시나 작고 호젓한 암자 '소원암'이다.
시내에서 큰 도로를 따라 30분쯤 가다 보면
오른쪽 공터에 작은 입간판이 있다.
'소원암-마을 길 끝'
그 공터 옆에 오른쪽으로 진입하는 살짝 좁은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끝까지(다른 차가
마주 오지 않길 바라면서) 조심 조심하며 20분을
들어가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암자이다.
마당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지대가 높은 곳에
철제로 만든 계단이 있고 그 위에 산신각이 있다.
마당 왼쪽부터 거꾸로 된 기역자 모양으로
지어진, 검은 기와를 얹은 작고 소박한 암자.
밖에서 문을 열면 복도처럼 마루가 깔려있고
거길 지나서 문을 열면 나오는 큰 방과 연결된 곳엔
소박한 법당이 있고, 법당엔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그리고 지장보살님 등이 모셔져 있고, 각각의
부처님 뒤로는 탱화가 차지하고 있다.
그 큰 방 안쪽에 있는 문을 열면 스님께서 서재 겸
기거하시는 방이 하나 있고, 그 방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방이 안쪽에 하나 더 있다. 방을
가로지르면 작은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면
나타나는 포근하고 아담한 방, 바로 영험하신
신을 모신 '신당'이다.
이곳은 스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우유 색깔 뽀얀 벽지로 사방을
도배했고, 출입문 반대편 벽에 나무로 된 제단이
높게 기역자로 있고, 그 제단의 정면에는 가운데에
인자하신 산신할아버지, 왼쪽에 용맹하신 장군님,
그리고 오른쪽엔 자애로우신 삼 제석 할머니를
모셨다. 세 분이 좌정하신 그 아래엔 빨간 용초가
타고 있는 촛대가 세 개 있고 그 중간에 향이 꽂혀
있는 향로가 있고, 바로 그 옆엔 네모난 상자에 담긴
침향이 놓여 있다.
그리고 왼쪽 제단 위엔 동자님들이 좋아할
여러 가지 자동차 장난감과, 꽃선녀님 것이 분명한
핑크색 공주 부채, 예쁜 유리 상자에 담긴 인형,
그리고 동자님들 최애인 츄파춥스 막대사탕통과
여러 가지 과자랑 다양한 모양의 초콜릿들이
빼곡하게 올려져 있다.
그리고 방 중간에 둥근 탁자가 있고, 그 탁자를
중심으로 의자 다섯 개가 놓여있다. 그리고 각 의자
등받이엔 주인 이름이 적혀있다. 시계 방향으로
천상동자, 명도동자, 산신동자, 용궁동자, 그리고
꽃선녀.
의자의 주인들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말이 없이
조용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각자, 너무나
분주하다. 그림도 그리고, 레고 블록도 맞추고
어마어마한 1000피스짜리 퍼즐도 맞추고 있다.
맨 왼쪽 벽에는 옆으로 기다란 옷걸이 봉이 있고
동자복이랑 선녀옷이 색색깔로 그림처럼
걸려있다. 둥근 탁자가 놓인 바로 옆면 문쪽 벽에는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걸려있고 그 아래에는
검정, 파랑, 빨강 보드마커와 두툼한 지우개가 있다.
또 오른쪽,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넓은 벽에는
빔 프로젝트가 설치되어 있다. 이것의 용도는
누군가 찾아와 소원을 말하면, 들어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그때 참고하기 위해 자료화면을
보려면 꼭 필요한 것이다.
"오늘은 또 뭐임..?"
제일 좋아하는 연한 핑크색 선녀복을 입고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핑크색으로 반짝이는
인조 손톱을 붙이며 만화 그림에서 나온 듯,
말 그대로 '만찢녀'인 어여쁜 꽃선녀가
천상동자에게 묻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를 바라보고 있던
천상동자가 일어나 방문밖에 "회의 중"이라고
팻말을 걸고 들어와 화이트보드에 커다랗게 쓴다.
오늘의 안건 - (복숭아 밭 봉사)
그리고 다들 둘러보며
"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신도 정씨네가 복숭아 밭이
많잖아. 근데 올해는 정 씨도 이제 나이가 많아서
힘을 못 써. 또 그 안 보살도 두 달 전에 수술하고는
몸이 안 좋고. 근데 그 아들이랑 며느리는 엄청
게을러. 그 넓은 밭에 있는 나무를 어쩌지도
못할 거야. 모두들 알지..? 이대로 두면 보나 마나
작황이 안 좋을 거야. 그래서 우리 제자랑 이씨네들
보내서 한 사흘 보듬고 밟아주고 오게 하려고.
그럼 올 농사 진짜 잘될 거야. 어때 내 생각이..?"
안 그래도 초롱한 눈을 더 치켜뜨며 모두를
바라본다.
잠시들 손을 멈추고 바라보다가, 늘 그렇듯 오늘도
또 시작이구나... 싶은 표정으로 대꾸도 안 하고
다시 고개 숙이고 그냥 각자 할 일을 한다.
명도 동자가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서더니
" 그래, 그 집 농사 잘되게 해주는 건 좋아. 뭐.
근데 병들어서 다 죽게 된 큰 아들 살려주고
장가들게 해 주고, 또 삼신까지 받아서
잘생긴 아들까지 낳게 해 주고, 그랬는데 뭐.
또 밥벌이도 못하던 그 집 셋째는 취직시켜 놨더니
코빼기도 못 본 지가 10년 아니, 7년이 넘었고만. 뭐
도대체가 인간들은 지들 다급하면 난리 난리 그런
생 난리가 없다 싶게 난리 치다가 다 해결해 주면
쌩, 그걸로 끝이야. 근데 뭐. 이제 농사까지 해 주라고..?"
"그렇긴 한데 아들들은 그래도 정 씨 내외가 우리
제자한테 잘하잖아. 제자 말 안 들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초하루에도 빠지면 큰 일 나는 줄 알고는
꼬박꼬박 날짜 적어놨다가 챙겨서 오고. "
천상동자가 열심히 변호한다.
"아 그거야 우리 공수가 틀린 적이 없으니까 뭐.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다 되는 걸 아니까
그런 거지 뭐. 30년을 우리 덕보고 살았는데
그래서 이렇게 잘 살게 됐는데 그럼 뭐. 그니까
우리말대로 우리가 하라는 대로 다 하는 거지.
옛날에 여기 처음 왔을 때 그때 그 정씨네를
생각해 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근데 이젠 그때
그 마음을 다 잊었잖아. 내 말이 뭐..? 틀려..? "
명도동자의 말이다.
"우리가 안된다고 하면 안 보낼 거임..? 어차피
보낼 거면서 회의는 왜 맨날 하심..? 그리고 우리
제자는 매일 기도하기도 바쁜데 이제는 복숭아 밭까
지 보내고 그러심. 안 그래도 말랐는데 요즘은
더 빼 싹하니 그렇더구먼. 그럼 기도나 좀 깎아주던
지 하심요."
새로 붙인 손톱이 마음에 드는지 오른손을 들어
올려 매만져보면서 꽃선녀가 하는 말이다.
"맨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물어보기는 뭐.
알아서 하던지 뭐."
명도 동자가 양 팔짱을 끼면서 앉는다.
그리고 다들 말이 없다. 그러자 천상동자가
"그럼 다 찬성(?)인 걸로 알고 내가 가서
제자한테 말하고 온다~~?
나 그럼 말하러 간다 ~~? "
또 신났다.
누가 붙잡기라도 할까 봐 얼른 후다닥 방을 나와
건넌방으로 가서 서재 한쪽에서 자고 있는 제자를
깨운다.
"왜요.,? 저 새벽 기도하고 이제 좀 자려고
누웠는데." 눈을 비비며 제자가 일어나 앉는다.
바로 코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천상동자가 말한다.
"거 왜 정씨네 있잖아..? 그 집에 가서 사흘만
일해주고 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대답 없이
눈을 멀뚱이고 있는 제자한테 큰 소리로 말한다.
" 아 정씨네 복숭아 밭에 가서 밟아주고 오라고."
" 왜요..? "
새벽 댓바람에 이건 뭔 소린가 싶다.
"가서 꽃도 따주고 , 여물게 과실도 만져주고
그 아래 밭에 뿌리도 단단하게 밟아주고 하라고."
"그니까 왜요..?"
"왜는..? 복숭아 잘되라고 그러지."
"그니까 제가 왜요..?"
" 아 복 안 지을 거야..? 더 말 필요해..?
이씨네 세 자매 데리고 가. 그리고 갈 때 먹을 거
사가지고 가. 그 집 며느리가 인색해서 먹을 게 없어
배고플 거야. 이씨네 자매들 좋아하는 커피도 사고
그 땅콩 박힌 초코바도 사. 우리 제자 좋아하는 콜라
도 사줄게 됐지..?
오늘 말고 내일부터 사흘만 해."
아니 복은 맨날 짓고 있구먼, 뭘 이젠 복숭아밭까지
보내고 그러신대 진짜 ㅠㅜ
제자가 투덜대거나 말거나 할 말을 다 했으니
옥색깔 동자복 자락을 멋지게 날리며 휙 뒤돌아서
천상동자는 신당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다가 다시
나와 문 앞에 "회의 중"이라 걸었던 팻말을
떼어가지고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