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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리뷰
<줄리아나 도쿄>는 데이트 폭력 피해자, 성소수자, 성매매 시장으로 간 미혼모 등 고통받는 자들의 서사라 읽다가 멈추기를 계속 반복했다. 나는 어지럽게 뒤엉킨 사건들의 순서를 이해하고 맞춰보는 대신, 작가의 말대로 좋은 것들은 미래에 더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해야만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주와 유키노는 국적도 젠더도 다르지만 데이트 폭력이라는 비슷한 아픔을 서로 공유하고 연대하게 된다. 아마 자신과 닮은 상대방에게 위로를 건내며 본인도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이 둘의 이야기가 가장 읽기 힘들었는데 소설을 통해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지배와 복종 관계를 형성하고 정신과 육체를 학대하는 문화가 하루 빨리 청산되길 간절히 바랐다. 동거하는 동안 함께 밥을 먹고 장을 보는 등 별 거 없는 일상으로도 위로받는 모습이 계속 아른거리면서 아직도 가슴 한 켠이 시리다.
유키노와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읽을 땐 여성 노동자와 성매매 시장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미혼모의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여성들은 온몸을 던져 말하려 했지만 돌아온 건 강간과 폭행이었다. 겨우 낸 목소리가 또 다른 폭력으로 사라졌다.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닐까. ‘좋아해서’가 아니라 좋아해야만 하는 것. 떠밀리듯 한 선택에 너무 무거운 책임을 지고 살아야 했던 이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원래 자아는 분리될 수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자신의 자아를 모두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매춘 여성에게 자아 분할은 필수적이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문제는 자아분할이 왜곡과 비인간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매춘을 어떻게 선택하고, 동의하고 마침내 무너지는지 실상을 알게 된다면 절대 ‘당신의 선택이니 모든 결과를 받아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읽고 나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한주와 아사쿠사바시의 꼬치구이 노인이 함께한 시간이 담긴 챕터다. 문학을 공부했고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묵묵히 꼬치를 굽고 있는 노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은, 흐르는 강물과 같은 시절이 나에게 오는 상상을 했다.
미혼모, 성소수자, 노동자. 작가는 인물을 통해 ‘집단을 표본화한다면 그저 한 덩어리겠지만, 사실 그 안에는 수렴되지 않은 개인적인 발언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영원히 피해자 위치에 머무르지 않길, 발 디딘 곳 어디든 자신을 온전히 내보일 수 있는 단상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