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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ida Lee 이레이다 Jun 06. 2021

불안을 담은 캐리어

01. 목련여자고등학교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더라.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야기하면 되겠다. 여자중학교를 졸업했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집 앞에 있던 여고는 야간 자율학습을 빼주지 않으니, 절대 가지 말라는 미술학원 언니들의 조언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꾸준히 대학 주최 미술대회에서 상을 타야 대입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집에서 50분 걸리는 야간 자율학습을 잘 빼준다는 목련여자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다들 근처 중학교에서 왔기에 아는 얼굴들은 삼삼오오 모여 친구가 되었고, 나만 홀로 있었다. 쉬는 시간, 그 짧은 10분의 어색함을 덮어줄까 해서 꺼냈던 그놈의 학원 전단지. 그때 그 종이를 꺼내는 게 아니었다. 가방 속에 꼬깃꼬깃 문학, 역사 교과서 사이에 삼각형 모양으로 끼어있던 그 종이를 영어 이동 수업 교실에 도착하고 꺼냈던 그날만 아니었다면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을 텐데...

"안녕? 너도 여기 대학 학원 단과반 다니니? 반가워! 난 주말반 다니는데, 너는?"

이게 민정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여느 여고생들의 헤어스타일과 같았다. 긴 머리에 마른 체형, 고등학교 주임 선생님들 감시하에 컬을 넣지 않은 자연 곱슬머리라는 거짓말이 통과할 수 있던 것은 민정이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작은 사회와 같다는 말이 그때는 되지도 않는 선생들의 우월 의식과 자신의 위치가 학교에서는 높기 때문에 학생 사이에서라도 최상위 포식자임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때는 모든 상황 불평등했고, 불합리했다. 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냐고 따지면 반성문 3장과 벌점이 내 반/번호/이름을 포함해 주렁주렁 달렸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자연히 불만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의 생기발랄한 눈빛은 해가 지날수록 흐리고 탁해졌고, 벌점은 줄어갔다.


불안을 담은 캐리어, 이레이다, 2021


민정이와는 단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 없지만 우리는 단짝이 되었다. 공부하는 모습을 딱히 본적 없었고, 노력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았다. 친구들의 환심을 사고자 용돈을 모아 큰맘 먹고 막대사탕 5개와 피크닉 음료 5개를 가방에 챙겨 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그 아이 주변은 북적였다.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 아이는 말을 잘했다. 차분한 톤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고, 주장한 게 이뤄지지 않아도 고개를 곧게 들어 옅은 미소를 지고 교실로 돌아가는 그녀는 항상 승자였다.


우리가 점심시간마다 만나서 밥을 먹고 오전 시간의 불만을 공유했다. 같은 반이 아니어서  친구 이름을 정확히 말하며 헐뜯어도 마음이 놓였다. 물론 1학년 때는 다소 불안함이 있었지만, 우리는  문과냐 이과냐를 고민하면서부터 서로가 같은 교실에서 지낼 가능성이 '0'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더욱 과감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가진 불만이 어디로 전달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 없는 믿음이었다. 민정이와 이야기할 때면,  불안한 상태를 정리하여 말하는  아니라 5 뒤에도 바뀔 상태를 3 뒤와 3  어제  시간의 상태와 내일  시간의 상태를 상상하여 말했다. 소설  등장인물들과 자신을 혼동하는  아니냐고 민정이가  정신상태를 걱정하는 말을 했을 , 순박하게 ‘ 책은  읽어라고 답하곤 했다.


실제로 내 부모님은 독서와는 거리감이 많은 사람이었다. 주로 영화나 드라마를 틀어두고 대사를 외울 때까지 보는 사람들 었는데. 무의식 중에 그런 모습이 당연해졌고, 스스로도 책을 읽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는 정신승리로 ‘독서와 드라마, 영화 보기’를 같은 값이 나오는 등위식으로 만들었다. 둘은 서로를 크게 공감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3년을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주로 시간을 많이 보냈다는 점과 그녀 말고 딱히 친구라고 칭할 같은 고등학교 친구가 없어서 공허한 나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친한 친구라고 서로를 지칭한 것은 식사를 함께 한다는 ‘식구’ 정도의 의미 었을지도 모른다. 민정이와의 친구관계에서는 좋아하는 가수도, 좋아하는 음식이나 색상도 그 무엇도 없었다. 내가 아는 민정이가 좋아하는 것은 자신이 독서를 좋아하고 가끔씩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에 가서 필사를 한다는 고상한 버릇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함께 학교 운동장을 걷거나 같이 길을 걷는 어느 순간들을 떠올렸다. 계속해서 재잘거리는 그 아이는 자신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말했다. 그런데 정작 내 목소리와 내가 하는 말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그 아이에게 말한 적이 있었는지 머리를 감싸고 기억하려 했지만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았다.

"희정아, 난 말이야.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리고 이런 삶을 살고 싶고, 난 이게 좋고 싫어. 난 너의 이런 점이 좋아. 나는 네가 이런 걸 했으면 좋겠어..."

그녀와의 대화는 줄곧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만나면 주로 그녀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앞으로 삶은 어떻게 살 것이고 가족과의 관계가 어떤지 등을 이야기했다. 먹고 싶은 음식이나 듣고 싶은 음악, 보고 싶은 영화 따위는 모두 그녀가 정했지만 왠지 불합리한 상황이라 생각하면서도 우리 관계는 이렇게 유지가 되었다.






본 게시글은 전기장판 출판사의 <불안을 담은 캐리어> 소설의 초입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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