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아이와 긴 머리
머리카락은 동양사상에서는 목(木)에 해당한다. 목은 움직이려는 힘, 생장, 봄의 기운을 의미한다. 슈타이너 인지학의 4구성체 중에서는 에테르체에 해당한다. 식물의 씨앗이 땅을 뚫고 줄기를 뻗으며 자라나듯이 머리카락도 쭉쭉 뻗어나며 자라난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동서양 모두 끈기 있게 자라나는 풀들에 비유를 많이 해왔다. 그래서 강한 생명력, 자부심, 관성을 뚫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용기와 실천력에 비유했다. 그래서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는 긴 머리카락을 지혜와 용기,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여기며 신성시 해왔고, 남녀노소 모두 긴 머리를 해 왔다.
머리카락은 양기(陽氣)를 가득 품고 있다. 머리카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기 표현의 수단이다. 남자들 중 머리가 긴 사람 대다수는 자기 표현이 강한 사람이다. 즉 마초적인 성향을 가진 남자들이 머리를 많이 기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섬세하고 여성적인 성향을 가진 남자들은 머리를 기르려 하기보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머리스타일을 유지하려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머리가 길면 손이 많이 간다. 손이 많이 간다는 건 그만큼 많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서 눈 앞을 가리면 시야 확보를 위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긴다. 운동을 하다가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리면 목과 허리를 흔들어서 머리카락을 등 뒤로 넘긴다. 더워서 목 뒤에 땀이 나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주며 바람이 통하게 한다. 이렇게 머리카락이 길면 몸을 많이 움직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손과 척추와 어깨를 자극하며 몸에 활력을 더욱 불어넣게 된다. 현대사회에서는 긴 머리가 여성적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긴 머리는 오히려 양기, 역동성, 남성적인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반대로 과다한 자극을 절제하거나 상대를 복종시키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를 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동양사상으로는 금(金)에 해당한다. 금은 칼, 가을의 기운을 의미한다. 가을에 찬 바람 불며 식물들이 열매 맺게 하는 한편, 풀들을 말라죽게 하고 나뭇잎을 떨궈내기도 한다. 그리고 칼은 누군가를 해치고 위협할 수도 있지만, 적절한 긴장감을 주고 성숙하게 하기도 한다. 금은 이처럼 드러내고 확장하는 힘을 멈추게 하고, 긴장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힘이며,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는 힘이다. 인지학의 4구성체 중에서는 자아체에 해당한다.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라 부르며 속세와 번뇌를 상징한다고 여겨서, 스님들은 잡다한 생각과 감정들을 쳐내고 수행에 집중하기 위해서 삭발을 한다. 그리고 군인이 머리를 짧게 깎는 것도 통제의 효율성과 복종심 고취를 위함이다.(사실 과거엔 군대에서도 짧은 머리가 일반적인 관행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스파르타를 군국주의 강성국가로 개혁한 리쿠르고스라는 인물은 군인들에게 긴 머리를 하도록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동아시아, 특히 한민족의 국가에서는 일제의 단발령이 내려지기 전까진 군인들도 상투를 틀거나 땋은 머리를 하는 등 긴 머리가 일반적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며 전쟁의 양상이 바뀌고 근대 산업사회로 문화가 바뀌면서 군인들의 머리카락도 짧아졌다.) 이처럼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전반적으로 음기(陰氣)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양기를 덜어내거나 억누르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걸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긴 머리카락이 음산함을 표현하는 상징물이기도 한데, 그건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으며 어둡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처녀귀신이 머리를 풀고 얼굴을 뒤덮고 있으니 음산하고 무서워 보이는 것이지, 처녀귀신이 단정하게 쪽진 머리를 하고 있다면 덜 무섭고 덜 음산해 보일 것이다. 긴 머리카락을 뒤덮으면 땀이 잘 나니 습하고,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어두워 보이기 때문에 음습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그건 결과론적인 것이고, 본질적으로 머리카락은 양기의 성질을 띄고 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는 가지치기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어린 나무는 가지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으로 한다. 어릴 때에는 가지치기 잘못하면 나무가 죽거나 성장에 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린 아이들은 인생의 봄이다. 동양사상에서 유아동기는 木의 시기라고 부른다. 호기심 넘치고 천진난만하고 생기발랄한 모습이 아이들의 본성이다. 개개인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아이들은 전반적으로 성별 가릴 것 없이 양기가 넘친다. 인지학에서도 아동기에는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의 영향을 많이 받는 시기라고 한다. 그 어린 시기에 맘껏 움직이고 맘껏 상상하며 세상을 경험해야 그걸 토대로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세상 속에서 함께 성숙해나갈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다. 그런 아이다운 성질을 지닌 게 머리카락이다. 필요한 경우 약간의 가지치기는 할 수 있지만, 짧게 깎는 건 어린 나무의 줄기를 잘라버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자아이들도 머리가 긴 게 원래의 모습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자는 짧은 머리, 여자는 긴 머리라고 여기는 고정관념 때문에 많은 남자아이들이 강제로 짧은 머리를 하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순전히 본인이 원해서 짧은 머리를 하고 싶어 하는 경우라면 존중해줘야겠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남자아이들에게 자기 의사 따윈 묻지 않고 머릴 잘라버린다. 그리고 남자아이들 머리 자를 때 어떤가? 바리깡을 가지고 뒤통수와 귀 주변을 마구 긁어낸다. 그 과정에서 상처가 나거나 피가 나기도 한다. 그렇게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서 따갑고 아프다. 이게 청소년이나 성인의 경우엔 잠깐 불편하고 말겠지만, 감각이 예민한 영유아나 초등 저학년에게는 정말 큰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다.(여자아이들의 경우 보통 자르더라도 살짝 다듬기만 하고 짧게 잘라봤자 단발이기 때문에, 바리깡으로 살을 긁어내는 일이나 짧은 머리카락이 살에 붙어서 따갑고 고통스러울 일은 크게 없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활발하게 움직일 아이들을 억지로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하고, 머리 자르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달랜답시고 사탕 초콜릿 등의 불량식품을 입에 물려주거나, 머리 자르면 갖고싶은 장난감 사준다고 조건부 보상을 내거는 경우가 많다. 거기다가 아이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스마트폰 태블릿 같은 미디어 기기를, 아이들이 머리 자르면서 몸부림치지 못하게 하려고 미디어 기기를 머리 자를때마다 버릇처럼 보여준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억압하고, 무분별한 미디어 노출에, 조건부로 보상을 내걸어서 아이들의 자발적인 의지를 약해지게 만드는, 교육적으로 정말 안 좋은 게 남자아이들 강제로 머리 자르는 일이다.
아직까지는 남자는 짧은 머리, 여자는 긴 머리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남아있다. 그래도 내가 처음 머리를 길렀던 2000년대 중후반을 생각해보면 많이 발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머리 긴 남자를 찾아보기가 모래밭에서 바늘찾기마냥 어려웠고, 화장실이나 목욕탕에 갈 때에 시비거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요즘은 길거리에만 나가도 머리 긴 남자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사회가 개성을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가면서 머리 긴 남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아동의 경우엔 아직도 머리가 긴 남자아이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아이가 머리가 길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서, 머리가 긴 남자아이를 보면 여자아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억지로 머리 잘리며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며 안타까워서 머리를 자르지 않으려 해도, 사람들이 아들을 자꾸 여자아이로 오해하는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아들의 머리를 짧게 잘라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사람들의 그런 오해가 성가시다고 해서 남자아이들에게 짧은 머리만 하도록 강요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이건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문제다. 아이들은 자기 신체에 대해 침해받지 않을 기본 권리가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성장에 중요한 부분을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불과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동 노동은 당연한 관행이었고, 사랑의 매 역시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관행이었다. 그 당연한 관행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생기고, 커다란 혼란의 시간을 겪으며 지금은 아동 노동과 사랑의 매가 아동학대라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자리잡게 되지 않았는가. 남자아이들 억지로 머리 짧게 깎는 관행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은 혼란스럽고, 관행에 따랐으면 받지 않았을 오해도 받겠지만, 결국은 아이들을 위해, 미래에 태어날 또 다른 아이들을 위해, 미래 인류를 위해 꼭 사라져야 할 관행이다. 지금 당장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억지로 남자아이들 머리 짧게 깎는 관행"도 점차 사라져 갈 것이다. 지금은 과도기고, 과도기에는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과도기에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혼란 속에서 힘들어할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 힘듦을 직접 겪고 이겨내어 세상이 변하는데 한 몫 했다는 그 뿌듯함은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