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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Nov 14. 2024

[SIPFF]사랑, 섹스, 연대에 깃든 삶 그리고 투쟁

제14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제 14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SIPFF)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120BPM

France/2018/143min/Drama/‘오픈 프라이드’ 섹션/로빈 캉필로 감독     



▶우리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지금에 도달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화의 현실은 과거가 되었다. HIV에 감염된 사람들도 꾸준히 약만 복용하면 에이즈가 발병하지 않고 비감염인과 같은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 약물로 바이러스 수치를 조정하면 전파 위험성도 완전히 사라진다. HIV/AIDS는 더는 죽음의 바이러스/질병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그렇기도 하다. HIV/AIDS에 으레 따라오는 사회적 편견과 혐오 때문이다.     


  〈120BPM〉은 두 가지 의미에서 HIV/AIDS가 죽음의 바이러스/질병이던 시절, HIV/AIDS 감염인들의 사랑과 투쟁을 다룬다. 1989년의 ‘ACT UP 파리’ 활동가들과 그들의 투쟁을 다루는 것이다. 이들은 자본과 정보를 독점한 제약회사, HIV/AIDS 감염인의 권리에 무감각한 사회와 그러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투쟁과 활동을 이어간다. 영화에는 수십 명의 활동가가 모여 투쟁 방향과 활동의 지평을 모색하는 토론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잘 짜인 조직, 효율적인 체계 없이 누구나 자기 의견을 말하는 토론은 종종 어지러울 정도의 난맥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주체성을 고양하기도 한다. 제약회사와 혐오 사회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의 급진적 투쟁의 원천은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죽음을 눈앞에 둔 당사자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직접 정보를 찾아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영역을 허물고, 가짜 피를 만들어 뿌려 자신들의 피를 낙인찍은 자들에게 ‘전염의 공포’를 되돌려주는 용기의 원천에는 이 토론 장면에서 형성된 집단적 연결감이 큰 역할을 했을 터다.     


  그러나 투쟁만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는 아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사랑하고 섹스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 연인이 입원한 병원에 방문한 그에게 키스해주며 연인의 성기를 주무르고 수음해주는 장면, 즉 죽음과 가장 밀접한 사랑과 섹스 장면에서는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피어오른다. 결국 세상을 떠난 이와 나눈 우정, 사랑, 섹스를 추모하며 다시금 싸움에 나서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떠올린다. 우리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지금에 도달했는지를. HIV/AIDS 감염인들의 삶, 사랑, 섹스,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겨울나기/Wintering

Korea/2024/66min/Drama/‘뉴 프라이드’ 섹션/장준영 감독     



▶가라앉더라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웨딩플래너로 일하는 30대 중반의 여성 ‘연’. 세 자매 중 둘째인 연은 치매가 있는 어머니를 홀로 모시고 있다. 직업과 일상에서 모두 남들을 돌보고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그녀에게 가족은 ‘감정노동’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에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점이 더해져 연은 더욱더 자기 세계로 통하는 문을 닫고 홀로 침잠한다. 애인도 연의 내면에 들어올 수는 없다. 연과 애인은 서로의 본명을 모른다.     


  결국 어머니를 요양원에서 모시기로 한 후 친가 식구들과 겪는 갈등, 불행했던 어머니의 과거, 동생의 싱글맘 선언, 친족 성폭행의 피해자로 보이는 연의 과거, 아픈 애인의 이름조차 몰라 보호자로 인정받을 수 없는 현실, 자매·모녀의 갈등과 화해……. 영화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이슈를 쏟아낸다. 이들이 유기적으로 엮이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각각의 완성도를 가진 개별 장면들은 한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음을 가늠케 한다. 어머니가 떠난 후 혼자 남은 집, 애인을 기다리며 담배를 태우는 듯 보이는 연은 결심한 듯하다. 이제는 자기 마음의 문을 열겠다고. 설령 가라앉더라도 혼자 가라앉기보다는 함께 가라앉겠다고.          




솔로/Solo     

Canada/2023/101min/Drama/‘월드 프라이드’ 섹션/소피 듀피스 감독     



▶이제는 ‘독한 년’이 되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때


  드랙 퍼포머이자 메이크업 일을 하는 사이먼. 어느 날 클럽에 뉴비 올리버가 온다. 사이먼은 단번에 올리버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사이먼에게 올리버의 등장은 사랑과 예술 두 영역에서 모두 혁신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사이먼은 올리버가 선물한 새로운 가능성에 조금씩 잠식되어가고, 종내에는 예술적·감정적으로 완전히 점유당하기에 이른다.     


  한편 사이먼을 두고 어린 시절 떠난 엄마가 오랜만에 공연을 위해 퀘벡을 방문한다. 사이먼은 그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고, 같은 아티스트로서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을 잃고 올리버에 종속당한 사이먼은 결정적인 무대에서 모든 걸 망친다. 이제는 ‘독한 년’이 되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때다. 가스라이팅과 타인의 인정 욕망을 넘어,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온전히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애정을 동력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관계성과 자기 존중의 포개짐 속에서 미래를 모색하는 퀴어의 혼란과 성장이 잘 표현된 영화다.          




란위/Lan Yu

China/2001/86min/Drama/‘스페셜 프라이드-홍콩 퀴어영화의 새로운 바람’ 섹션/관금붕 감독     



▶퀴어 친밀성을 관통하는 엇갈림이 자아내는 슬픈 정서의 단면


  성공한 사업가 한동에게는 비밀스러운 취향이 있다. 그는 직장 동료의 소개로 돈이 필요한 시골 출신의 가난한 대학생 란위을 소개받고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 이들의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한동은 란위를 비밀의 영역에만 둔다. 남자들 사이의 애정은 ‘너무 가까워지면 헤어지는 관계’이고 ‘이 바닥에서 진지한 관계는 없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동과 달리 란위는 한동을 욕망하기를 넘어 사랑하고, 그러기에 마음속에 조금씩 상처가 쌓여간다.     


  세월이 흘러 한동은 이성애 결혼 후 이혼했고 란위는 직장인이 되었다. 관계의 양상이 바뀐다. 한동은 란위를 가까이에 두고 싶지만 란위는 이전과 달리 조금은 차가워졌다. 그러나 한동의 사업이 위기에 처하자 기꺼이 도움을 주고 한동 역시 과거 자신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란위가 들어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긋나던 관계의 상이 지난한 조율을 거쳐 마침내 맞물릴 즈음, 란위가 사고로 사망하고 한동은 다시 혼자가 된다. 한동은 이제 란위가 떠날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그와 살을 맞댈 수도 없다. 한동과 란위가 란위의 죽음으로써만 불완전하게 함께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관계 모델을 가질 수밖에 없던 데 있지 않을까. 퀴어 친밀성을 관통하는 엇갈림이 자아내는 슬픈 정서의 단면을 포착한 수작.     




세바스티앙/Sebastian

UK, Finland, Belgium/2024/110min/Drama/‘월드 프라이드’ 섹션/미코 마켈라 감독     



▶게이 성노동과 세대 간 친밀성, 친밀성의 위계, 작가적 야망, 창작 윤리의 맞물림


  문학 잡지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맥스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경력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작품을 계약해 집필 중인 맥스. 소재는 데이팅 앱을 통한 게이 성노동이다. 맥스는 직접 성노동자가 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경험을 작품으로 풀어낸다. 물론 맥스의 고객은 그 사실을 모른다. 야심가인 출판사 사장은 재능 있는 맥스를 독촉한다. 더 다양한 방식의, 자극적인 성노동 경험을 재촉하는 것이다. 정작 맥스가 성노동에서 발견한 세대 간 게이 커뮤니티의 지식 전수의 가능성은 애초에 기획한 주제와 다르다며 빼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출판사의 요구에 따르다 잡지사 일에 소홀해져 해고당한 맥스는 점점 더 성노동과 집필에 매달린다. 문제는 손님/취재원 보호와 창작의 윤리다. 맥스는 맥스의 조바심은 점점 고조된다. 결국 맥스는 솔직해지기로 한다. 손님/취재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게이 성노동과 세대 간 친밀성, 친밀성의 위계, 작가적 야망, 창작 윤리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엮어내는 영화다. 다만 이들 소재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는지는 의문이다. 서로를 증폭시키기보다는 죽 나열되는 느낌이다. 각각의 주제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조금은 아쉬운 영화였다.          





유니콘/Unicorns

Usa, Sweden, UK/2023/119min/Drama/‘월드 프라이드’ 섹션/샐리 엘 호사이니, 제임스 크리스나 플로이드 감독     



▶매력적이고 섹시한 노동계급 남성성의 모델


  루크의 손에는 기름때가 껴 있다. 그는 지친 얼굴이다. 퍽퍽한 하루를 보낸 백인 정비공 루크. 그는 저녁을 위해 들른 식당에서 우연히 옆 건물의 퀴어 클럽에 들어간다. 서아시아 드래그 퍼포머들이 공연하는 클럽이다. 피부색, 옷차림 등 모든 것이 그와 이질적인 공간이다. 루크는 그곳에서 드래그 퍼포머 아이샤를 만난다. 약간의 플러팅이 오가고 두 사람은 키스한다. 그런데 이내 루크의 표정이 굳는다. 아이샤의 목젖을 보고서다. 루크는 아이샤를 여성으로 ‘오인’했다.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냉랭해진다.     


  영화는 완전히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루크는 노동계급 남성성의 전형을 체현한 싱글 대디다. 그는 ‘지원’받는 걸 수치스러워한다. ‘자립’에 대한 남성 판타지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이샤는 보수적인 이슬람교도 부모 밑에서 자랐다. 지금은 집에서 나와 공연으로 밥벌이를 하는 중이다. 아이샤는 가족에게는 언제 자신의 비밀을 들킬지 모른다는 긴장을, 익명의 도시인들에게는 언제 테러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함께 살아간다.


  첫 만남은 어그러졌으나 루크가 마음에 든 아이샤는 그에게 여러 도시를 오가며 공연하는 데 필요한 운전기사 일자리를 제안한다. 자식을 키우느라 궁핍한 처지인 루크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한다. 그 후 아이샤는 가족과 전통, 혐오의 굴레에 갇히는 처지가 된다.     


  이번에는 루크의 차례다. 그는 아이샤에게 직진해 노동계급 남성의 ‘박력’으로 사랑을 지켜낸다. 〈유니콘〉은 ‘넘을 수 없는 차이’를 넘어 결국 서로에게 가 닿고야 마는 로맨스 영화의 공식을 기분 좋은 설렘으로 충족시켜준다. 특히 루크로 분한 배우 벤 하디의 캐릭터와 연기가 인상적이다. 그는 거칠고 투박한, 그러나 그 안에 겉모습과는 다른 부드러운 무언가를 품은 노동계급 남성성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매력적이고 섹시한 노동계급 남성성의 모델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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