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폐막작 〈파랗고 찬란한〉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에서 자동차는 줄곧 중요한 상징물 역할을 해왔다. 〈후회하지 않아〉에서는 연인에게 배반당했다는 오해를 폭력적으로 해소하려는 범죄의 수단으로, 〈지난여름, 갑자기〉에서는 학생과의 로맨스에 혼란스러운 선생의 마음을 닮아 여기저기 방황하는 상징물로, 〈남쪽으로 간다〉에서는 탈영한 군인이 자기 욕망과 사랑의 실현을 위해 세상의 질서와는 정반대로 움직이며 거스르는 도구로써 자동차가 제시되었다. 제14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폐막작 〈파랗고 찬란한〉에서도 그렇다. 영화 초반 이미 퍼진 상태로 등장해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는 서로 좋아하는 두 남자, 그리고 이들이 자리한 산과 바다의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분명하게 암시하며 영화의 문을 연다.
영화과 학생들이 산불이 난 강원도 동해시의 한 산에서 촬영을 진행 중이다. 아니, 진행 중이었다. 자기 의도를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 감독과 열악한 제작 환경에 지친 학생들은 불만에 차 모두 현장을 떠나고 촬영장에는 감독 승훈과 촬영감독 지훈만 남았기 때문이다. 까맣게 타버린 나무처럼, 승훈의 졸업작품을 마무리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지훈은 내내 재잘대고, 승훈은 침묵한다. 지훈이 친구들과 함께 현장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언젠가 술에 취해 승훈과 있었던 일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훈은 그 일로 자신과 승훈이 서로에게 가진 마음이 비슷한 결을 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승훈은 그날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어떻게든 영화와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 나가려는 지훈에게 내내 무심하다. 불에 탄 나무와 침식 중인 해변의 모래사장은 서로의 마음을 두루뭉술하게 짐작만 한 채 가까워지지 못하는 두 남자와 닮았다. 자연, 영화, 두 남자의 관계 모두가 길을 잃고 사그라들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사실 승훈의 마음도 지훈과 같다. 다만 상대의 마음을 받아주려면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승훈은 산불과 해변 침식을 겪는 중인, 두 사람이 영화를 찍겠다고 남아 있는 동해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곳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 관계가 소문나자 서울로 도망갔다. 겁이 나서였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촬영 현장은 여전히 그에게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숙제를 상기시킨다. 결국 승훈에게 필요한 건 용기다. 불가피했으나 겁쟁이처럼 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떳떳하게 현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이 출발하겠다는 용기 말이다.
이 용기는 사랑뿐 아니라 기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승훈은 왜 불에 탄 산과 해수면 상승으로 침식 중인 해변을 카메라에 담아내고자 하는가? 지훈이 계속 캐묻지만 승훈이 답변하지 않는 질문, 즉 그에게 영화는 무엇인가? 두 사람이 산속 방공호에 들어가 바다를 내다보는 장면이 있다. 승훈과 지훈이 영화 스크린을 닮은 참호 틈으로 내다보는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아름답다. 승훈에게 영화는 그런 바다를 담아내는 도구다. 절망적이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의 수단인 것이다. 함께 바다를 바라보는 지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엉켜버렸지만 두 사람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기를 내 과거를 마주하면 기후에도 사랑에도 아직 기회는 있다. 두 사람이 조용한 산과 바다에서 고군분투하며 투박하게 빚어낸 것은 결국 미래의 가능성이었던 것이다. 기후와 사랑의 파국으로부터 두 사람이 길어낸 용기는 여전히 파랗고 찬란한 바다와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를 닮았다. 다른 세상은 이렇게 피어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