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노노케 히메〉
아주 오래전 ‘원령공주’라는 제목으로 본 이 영화를 다시 극장에서 보며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인간 마을의 수장 에보시와 원령공주 ‘산’의 대립 구도였다. 에보시는 사철을 체취하고 총포를 만들어 마을을 일으켜 세웠다. 이 과정에서 자연을 지키려는 멧돼지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 재앙신으로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생과 사를 관장하는 신 중의 신 사슴신의 목까지 노린다. 원령공주는 반대편에 있다. 들개신이 거두어 키운 그녀는 자연과 동물 그리고 그들의 정령 편에서 에보시에 대항한다. 두 여성이 각각 근대적 계발과 자연을 대변하며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보시는 단순한 ‘악’이 아니다. 에보시가 이끄는 마을에서 여성들은 철을 제련한다. 그래서 마을의 남자가 불평하듯 다른 마을 여자와는 ‘다르다’. 그녀들은 활기가 넘치며 ‘괄괄’하다. 마을에서 이등 시민 취급받지 않고 동등한 성원권을 가진다. 한편 에보시의 마을에는 총을 만드는 한센병 환자들도 있다. 이들은 모든 곳에서 버림받았지만 이 마을에서는 총을 만들며 에보시를 보좌하고 마을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 에보시는 자연을 ‘정복’하려는 동시에 탐욕스러운 또 다른 인간 무리에 맞서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도 분투하는데, 그녀가 지키는 건 단순히 사철과 총이 상징하는 권력뿐 아니라 그녀와 일체화된 소수자들의 꿈이기도 하다. 이렇듯 제국의 남성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온 근대는 자연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소수자 인간에게는 종종 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이 영화를 ‘인간 vs 자연’의 단순한 구도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원령공주가 대변하는 자연의 분노는 여전히 정당하며, 점차 시급해지고 있다. 그러나 에보시가 열어젖힌 가능성을 마주한 뒤인지라, 우리는 자연의 무조건적인 승리를 바랄 수만도 없다. 지금껏 내내 착취당하기만 하면서 상승을 도모하는 수많은 근대의 후발 주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영화는 분노한 사슴신의 잔해가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출발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마무리된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지치지 않고 중재자를 자처하는 에미시족의 후계자 아시타카의 의지를 강조하면서.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아시타카의 노력은 개발론자 인간과 분노한 자연 모두를 달래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가 오랜 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여전히 마음을 홀리는 것은 이와 같은 시대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놀랍도록 아름다운 서정의 드라마로 풀어낸 데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