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M. 버터플라이〉
〈패왕별희〉처럼 남자와 여자,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넘나들며 친밀성의 매혹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자로 분한 중국인 스파이가 모든 것이 밝혀진 후 자신의 동성(?) 연인 앞에서 발가벗고 선 장면이다. 송 릴링은 르네 갈리마드와 육체적 사랑을 나눌 때도 옷을 벗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남자라는 걸 들키지 않고 르네와의 사랑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별을 속인 릴리의 사랑이 완전히 ‘거짓’인 것은 아니다. 릴리는 르네를 ‘정말’ 사랑했다. 그 사랑만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4년 베이징. 경극 가수 릴링은 주중 프랑스 대사관에서 일하는 르네에게 접근해 그의 연인이 된 후, 그에게서 정보를 빼내 당에 전달했다. 그러나 릴링이 당에서 좋은 대접을 받은 건 아니다. 그 반대다. 그나마 대사관에서 정보라도 빼 왔기에 서구의 고급 예술(오페라)에 해박하며 젠더와 욕망의 규범을 위반하는 릴링이 당에서 처벌받지 않을 수 있었다. 즉, 릴링은 살기 위해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스파이 노릇을 하며 르네를 속였다. 그러나 르네와의 사랑을 이어가야만 점차 홍위병이 득세하는 당에서 생존할 수 있었기에 사랑에 ‘진심’이기도 했다. ‘당신께 수치심마저 드렸어요’라는 릴링의 편지는 르네를 유혹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지만, 사랑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진심 어린 연서이기도 한 것이다.
르네는 정보 분석 실패로 프랑스로 추방되듯 돌아가고, 릴링은 문화혁명으로 노동 교화형을 받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다시 대면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기서 나온다. 릴링은 또다시 스파이로 르네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릴링을 잊지 못해 삶이 망가졌던 르네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프랑스 정보 당국이 릴링을 검거하고, 르네도 릴링에게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아 두 사람은 함께 호송차에 오른다. 릴링이 옷을 벗는 건 여기서다. 여리여리하고 고운 선을 가진 릴링의 몸은 이전에 르네가 중국에서 품었을 때와 같은 몸이다. 하지만 릴링의 가슴은 아시아 여자라서 작은 것이 아니라 남성의 것이었기에 평평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사타구니에는 남성기가 있다. 르네는 그/녀의 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릴링은 달라진 것은 없다며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지만 르네는 도저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르네는 끝내 이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감옥에서 자살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거짓’인 동시에 ‘진실’일 수 있다는 혼란을 릴링은 감당하고 받아들이지만, 르네는 그러지 못한 것이다.
복합적 친밀성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아시아 여성성과 유럽 남성성의 관계다. 르네가 릴링에게 매혹당하는 순간은 그녀가 오페라 ‘나비부인’을 공연할 때다. 르네는 릴링에게 대화를 거는데, 릴링은 서구 남성을 향한 동양 여성의 순애보적 사랑을 그린 이 오페라의 줄거리가 중국인 입장에서는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자신이 제국의 일원으로 일하는 르네는 서구인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간파하고 비판하는 아시아 ‘여성’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일단 관계가 시작되자 양상이 바뀐다. 릴링은 아시아 여성에게 기대될 법한 극한의 수동성을 수행하고, 이를 자신의 성별 비밀을 감추는 빌미로 활용한다(옷 입고, 불 끈 채 섹스하기 등). 그리고 처음엔 부드러웠던 르네 역시 종종 릴링을 ‘나비’, ‘노예’로 부르며 권태로운 아시아에서의 삶에 활기를 보충한다. 릴링이 프랑스에서 르네를 다시 만난 때가 르네가 더 이상 엘리트 계급에 머물지 못한 때라는 점도 공교롭다. 어쩌면 르네는 중국에서처럼 그/녀를 통해 다시금 자신의 (식민지) 남성성을 고양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르네의 자살은 사랑의 좌절인 동시에 제국 남성성의 좌절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껏 본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결과 매력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