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너를 잡초라 불렀니?
우리 집 화단은 낙원이다
화단 정리를 하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화분 속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고무나무가 사는 커다란 집에 살포시 들어앉은 풀 한 포기. 작은 하트 모양의 이파리 세 장을 달고 있는 게 앙증맞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실바람에 몸이 실려 하늘하늘 리듬을 탄다. 여리디 여린 허리를 흔들며 날갯짓하는 모양이 흡사 나비와 비슷하다. 언제 이 낯선 곳으로 들어왔을까. 어떻게 우리 집까지 찾아왔을까, 요 깜찍한 괭이밥.
아마도 깨알만 한 씨앗 하나로 들어와 뿌리를 내렸을 텐데. 까마득히 높은 고무나무 아래에 다부지게도 살림을 차렸다. 이 집 저 집에 들어가 죄다 종자를 퍼뜨려 놓은 걸 보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싶다. 어떠한 역경에서도 끄떡하지 않을 강인함은 도대체 저 여린 몸속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외유내강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표주자로서 손색이 없다. 이렇게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편안하게 살고 있을 때까지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나도 참 어지간히 둔감한 식물 집사이다.
언젠가는 정원을 가꾸겠다는 꿈을 안고 베란다에 작은 화단을 꾸며놓은 지 벌써 여러 해다. 붉은 꽃송이가 팡팡 터지는 제라늄과 정열을 토해내는 보랏빛 사랑초 등 제법 많은 꽃식물이 어우러져 있다. 제각각 크고 작은 화분을 차지한 화초들은 명패까지 버젓이 달고 있다. 고무나무 입장으로 볼 때 괭이밥은 무단침입자나 다름없겠지.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허락도 없이 슬그머니 남의 집에 들어와 터를 잡았으니 말이다. 한데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텃세를 부리거나 눈치 주지 않으니 나만큼이나 무던한 고무나무 아닌가. 기가 죽을 법도 한데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서는 괭이밥 또한 한집에 모여 살아갈 만한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좀 더 세심히 들여다보니 키 큰 나무가 자라는 데 지장을 주는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낮은 위치에서 납작 엎드려 흙이 마르지 않도록 알맞은 습도를 유지해주고 있다. 각자의 생존에 방해는커녕 작으나마 보탬을 주는데 굳이 허물을 잡아낼 필요가 있겠는가. 서로 다른 생김새로 만나 특별한 문제 하나 일으키지 않고 오순도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티격태격 싸우는 일이 빈번한 사람 세상도 배려와 공존을 베푸는 식물 세계를 닮아간다면 얼마나 순한 사회가 될까.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풀들을 하찮다 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가끔 화단에 앉아서 눈에 띄는 풀마다 몰인정하게 쏙쏙 잡아 뽑아버렸다. 지금껏 내 손으로 목숨 줄을 잡아챈 것만 해도 수십 포기는 될 것이다. 하마터면 오늘도 손가락을 길게 뻗어 우악스럽게 괭이밥을 덮칠 뻔하지 않았나. 권포근 잡초요리 연구가가 쓴 《잡초 치유 밥상》이라는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 풀의 효능과 요리법을 공개하며 잡초를 하늘이 내려준 ‘신들의 음식’이라 표현한다.
저자는 이 세상에 하찮게 태어난 풀은 어디에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비록 풀로 태어났어도 저마다 뛰어난 약성이 있어 면역력을 높여주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역설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어쩌다 그냥 뿌리내린 게 아니고 저마다 특별한 임무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깨닫게 해 준다.
엄밀히 따져보자면 풀이라는 이름도 태어날 때부터 붙여진 것이 아니다. 하찮다는 의미의 잡초라는 이름이 붙느냐, 화초라는 이름이 붙느냐는 인간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달려 있다. 피어난 꽃을 보고 ‘예쁘다’라고 인식하면 ‘꽃’으로, ‘예쁘지 않다’라고 인식하면 ‘풀’로 식물도감에 등재된다고 한다. 꽃이냐 풀이냐 식물의 운명을 거머쥐고 있는 게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이라니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가.
금수저로 태어났느니 흙수저로 태어났느니 따지는 것도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의 간사한 마음이 지어낸 말이다. 굳이 신분을 나누며 편을 가르는 우리 모습에 식물들이 뭐라 흉을 볼지 겁이 난다. 이 지구라는 행성에 우리 인간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발을 내딛고 살아온 식물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는 게 슬쩍 미안해진다.
우리 강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잡초 대부분은 약초의 성분을 지녔다. 그중에서도 괭이밥은 아주 특별하다. 독소를 풀어주는 성분이 들어 있어 동물의 생명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풀이다.
식물학자들은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동물과의 연관 관계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찰하면서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쥐약을 잘못 먹어 고통에 신음하는 고양이가 제일 먼저 괭이밥 무덤을 찾는다는 사실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이파리를 뜯어먹고 뱉고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결국 몸속의 독소를 빼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고양이가 풀더미 위에서 온몸을 비벼대며 발버둥 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괭이밥은 생사가 달린 길목에서 고양이의 특별한 구원자요,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마땅히 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풀이다. 한 지붕 두 가족이 되든 세 가족이 되든 싸우지 않고 어우러져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곳이 바로 식물의 낙원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당분간 무심한 척 이 녀석들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혹시 또 모를 일이지 않은가. 피치 못한 사정으로 긴급하게 해독제가 필요할 일이 생길지도. 그때 괭이밥은 기꺼이 온몸을 바쳐 임무를 완수하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괭이밥의 최후를 함부로 입에 올린다는 건 지나치게 속 좁은 편견이 아닐까. 이듬해 헤벌쭉 웃는 얼굴로 우리 집 화단에 내려앉아 다시 살림을 차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햇빛과 바람, 물이 풍부하다고 점찍은 우리 집을 삶의 낙원으로 알고 터를 잡은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