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기웃거렸다. 학교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얀 바탕에 고딕체로 쓰인 ‘메밀국수’라는 간판이 멀리서 손짓하는 것 같았다.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이십 년이 넘도록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구나.’
식당 앞에 뚝 멈춰 섰다. 체질상 가리는 음식이 많았어도 메밀국수만큼은 즐겨 드시던 스승님과 딱 한 번 왔던 곳.
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뒤 어깨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떨구며 안으로 들어섰다. 좌식이던 식탁이 입식으로 바뀐 것 말고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듯하다. 선한 눈매를 가진 주인도, 토속적인 분위기도 예전 그대로이다. 국수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맛있게 잡수세요” 하던 이십 년 전의 인사말도 여전했다.
나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교육대학과 국문과 두 갈래에서 고심했다. 평생 꿈인 교사가 되려면 반드시 교육대학을 가야 했지만 글을 쓰는 작가도 되고 싶어 국문과도 가고 싶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교사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간곡함이 아니더라도 가난한 우리 집 형편에는 학비가 적게 드는 쪽이 어울렸다. 결국 나는 교육대학을 선택했다.
결혼하고 살림과 출근을 병행하면서 육아에 신경 쓰느라 연일 힘에 부쳤다. 정식으로 글을 배워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은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아이들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지 않아도 될 무렵, 숨죽였던 나의 열정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동시에 무속신앙을 연구하던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수필교실을 운영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족을 앞에 두고 '일주일에 단 하루만큼은 나를 위해 쓰겠다'는 선전포고를 울렸다.
첫날 강의실 문을 여는 손가락에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쿵쾅대는 심장을 추스르며 수줍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깡마른 체구에 '비사이로 막가'라는 별명을 가진 교수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강의하는 내내 제자들을 두루 살피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을 듯했다.
수필에 대한 이론과 함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법에 대해 배워나갔다. 수업 방식은 글 한 편을 써서 발표하고, 평가를 받는 순서였다. 난생처음 써 본 글을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게 부끄러워 목소리는 저절로 모깃소리만큼 작아졌다. 낭독이 끝남과 동시에 스승님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글의 여기저기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눈물이 쏙 빠질 거라는 귀띔으로 예상은 했으나 강도가 너무 세어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런대로 성실하게 출석하다 보니 글이라는 형태가 어슴푸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희대 교정이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던 어느 날, 첨삭지도를 받으러 교수회관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써왔던 글을 죄다 검토해 봤다는 스승님은 ‘색깔 있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내 글 중에 ‘시루떡’, ‘홍시’, ‘개떡’, ‘팥죽’ 등을 예로 들며 음식과 관련된 글을 쓴다면 개성 있는 수필가가 될 거라는 덕담도 해주었다. 그 당시 ‘꽃’이나 ‘옛 물건’ 등 한 가지 주제만을 고집하여 쓴 유명한 작가의 책도 건네주면서.
햇병아리가 삐악 하기도 전에 꼬끼오 소리를 내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 가지 소재로만 글을 쓴다는 것을 엄두도 못 낼 신출내기의 어쭙잖은 글에 나만의 색깔까지 입힌다? 도통 자신이 없었다. 토해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 짬을 내어 글을 쓴다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만했다. 잠깐이라도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에 만족할 뿐, 다른 욕심은 없었다. 교수회관 계단을 내려오는데 스승님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자신의 색깔을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음식에 관한 수필을 써 봐.”
스승님은 단골로 알려진 메밀국수 전문점으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그날 따뜻한 메밀국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김이 나는 국수 위에 보기 좋게 뿌려진 김가루에서 바다향이 일었다. 냉 메밀국수와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도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에 관한 색깔 있는 글은 여전히 요원했다. 음식을 소재로 한 글은 있으나 과연 나만의 색깔을 입혔는지 의문이 들었다. 역량은 부족하고 열정만 앞선다는 것을 알고 더 많은 가르침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승님은 그때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팔순이 넘어서도 집필 활동이 정정했고, 후학을 위해 헌신하던 분이 무심한 세월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병석에 눕고 말았다. 여름에도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감싸고, 언제나 모자를 쓰던 스승님. 안경 너머 날카롭던 눈빛이 갈수록 인자한 빛을 뿜어내던 분. 체질 감별을 해준다면서 제자들의 손바닥 위에 말린 감자나 대추를 올려놓고 지그시 눈을 감으면 찌릿찌릿 기가 전해져 오는 듯했다.
반백이 다 된 주인이 메밀국수 그릇을 내려놓으며 “맛있게 드세요”라고 한다. 김이 오르는 국수 위에 가늘게 채 친 유부와 다시마가 올려져 있고, 다진 파 위에 김 가루가 소복이 올라앉았다. 마지막 고명은 역시 김 가루여야 한다고 다짐하듯 변함이 없는 메밀국수. 차마 젓가락을 들지 못하고 그날을 회상한다.
어떻게 글공부하러 갈 용기를 냈을까? 그날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글 쓰는 즐거움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갈 텐데. 한 번 더 메밀국수를 대접해 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이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만의 색깔을 입힌 맛있는 음식 수필을 써서 스승님께 꼭 대접해 드리고 싶다.